2025년의 아이돌 팝을 돌아보며, 아이돌로지는 전/현역 필진 9인과 객원 심사위원 5인(도니언, 만나, 잔물결, 티미랩, 파이)의 투표를 거쳐 2025년 발매 아이돌 팝 앨범 중 올해의 앨범 20개를 선정했다. 별도의 순위는 산정하지 않았으며, 순서는 발매순으로 정렬했다.
Honorable Mention
20선 소개에 앞서, 아쉽게 최종 선정되지 못한 앨범 11개를 오너러블 멘션 리스트로 공개한다. (순서는 발매순)
캔디스 “Playground”
아이브 “IVE EMPATHY”
키키 “UNCUT GEM”
츄 “Only cry in the rain”
아일릿 “bomb”
크래비티 “Dare to Crave”
프로미스나인 “From Our 20’s”
조유리 “Episode 25”
이프아이 “sweet tang”
보아 “Crazier”
웬디 “Cerulean Verge”
리사 “Alter Ego”
조은재: 다섯 가지 자아를 통해 리사의 다양한 캐릭터를 보여주는 “Alter Ego”는 아이돌적 캐릭터 롤-플레잉과 이미 전세계를 무대로 활발하게 활동 중인 아티스트로서의 리사의 능력치를 훌륭하게 배합해 ‘5인분’을 너끈히 해낸다. 에스닉한 멜로디에 충분한 중량감을 실어 던지는 래핑은 첫 솔로 데뷔 싱글이었던 ‘LALISA’ 때부터 리사의 시그니처 사운드로 인식되어 왔는데, 선공개 싱글이었던 ‘Rockstar’와 타이틀곡 ‘FXCK UP THE WORLD’에 와서는 이전보다 훨씬 선명해진 베이스 사운드와 압도적인 카리스마로 리사의 ‘권력’을 체감하게 한다. “Alter Ego”의 미덕은 단순히 이 강력한 에너지를 밀어붙이는 데에 그치지 않는다는 점인데, 데뷔 초 귀여운 소녀 리사를 연상케하는 Kiki의 ‘Rapunzel’이나 서정적인 발라드도 훌륭히 소화해냈던 블랙핑크를 떠오르게 하는 Sunni의 ‘Moonlit Floor’의 로맨틱한 무드 또한 다채로운 리사의 모습을 보여주는 데에 부족함이 없다. 퍼포머로서의 이미지가 굳어지는 것을 경계한 듯 최대한 다양한 레퍼토리를 연구해온 정성이 느껴지기에, 리사 혼자 5인분을 해내는 공연 또한 기대하게 만드는 앨범이다.
제니 “Ruby”
조은재: “Ruby”는 제니다운 우아함을 자신있게 드러내는 앨범이다. 날렵하게 벼려진 래핑은 세공된 보석의 모서리처럼 날카롭고, 한층 여유로워진 보컬은 은은하게 붉은 빛을 발산한다. 여러 뮤지션과의 콜라보도 눈길이 가지만, 결국 이 무대의 주연은 제니라는 점을 결코 놓치지 않는다. 그래서 이 앨범은 자신감과 자존감의 표현으로 가득하다. 타이틀곡 ‘like JENNIE’의 “예술작품엔 필요해 Frame이”, “Yes, I’m guilty 잘난 게 죄니”와 같은 강렬한 펀치라인부터 “Extra large, ain’t scared of the dirt(진흙탕도 두렵지 않은 큰 사이즈)”(‘ExtraL’), “She’s that stunna / Ere’one know that she is me(그녀는 정말 멋지고 / 그게 나라는 걸 다들 알아)”(‘Mantra’) 등에서 드러나는 자존감, 그리고 자기애에서 그치지 않는 자매애적 표현들이 곳곳에 꼼꼼하게 들어있다. 케이팝 신(scene) 안에서 근래에 이만큼 우먼 임파워링(women empowering)을 의식한 앨범도 드물 듯한데, 단순히 여성만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특히 ‘ZEN’과 같은 곡은 외부로 뿜어내는 에너지가 아닌 내면으로 향하는 성찰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아시안으로서의 자존감과 고양감까지 고취시킨다. ‘ZEN’에서의 명상을 끝낸 뒤에 이어지는 트랙이 비교적 차분한 이지리스닝에 자전적인 내용으로 흐른다는 점에서 한 편의 잘 만든 여성서사 작품으로서도 충분히 기능한다. 진흙 바닥에 굴러다니던 루비를 무대 위에 올려놓는 데까지는 얼마나 큰 힘이 필요했을까. 이 앨범은 바로 그 ‘힘’에 대해 이야기한다.
엔믹스 “Fe3O4: FORWARD”
미묘: “6곡을 수록한 이 미니앨범은 지금 K팝에 기대할 수 있는 최선의 것들로 꽉 채워져 있다. 타이틀곡 ‘KNOW ABOUT ME’는 드라마적이고 고혹적인 후렴구의 출렁임을 여러 방향으로 증폭하며 강한 흡인력을 선보인다. 이어지는 수록곡들도 다채롭게 변화하는 역동적 구조로 듣는 이의 허를 찌른다. ‘Slingshot (<★)’과 ‘Papillon’이 치밀함과 짜릿한 매력을 잘 보여준다면 ‘Golden Recipe’와 ‘Ocean’은 그 같은 시도로 비로소 끌어안을 수 있는 독특한 앰비언스(ambience)를 만끽하게 한다. (중략) 엔믹스가 현기증 날 듯이 다양하게 기워서 붙이는 K팝의 혼종성을 극한으로 가져가려 했다면, 그 완성에서 방점을 두는 곳 역시 K팝이다. K팝이 아니라면 이런 작품이 나올 수 없고, 나올 이유도 없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엔믹스는 K팝을 하려 한다. 그저 뚝심 있게, 아마도 가장 혁신적인 K팝을.” (〈주간동아〉 2025.03.24. “가장 혁신적 K팝 들고 돌아온 엔믹스” 中)
텐 “STUNNER”
퀴비: ‘네오’라 칭해지던 NCT의 아방가르드 SMP를 가장 고집스레 사수하던 유닛 NCT 127이 멤버들의 ‘군백기’로 불가피한 휴지에 들어간 사이, ‘네오’의 명맥을 제일 충실하게 이어나간 것은 다름 아닌 텐이었다. 돌이켜보면 애초에 그는 네오-컬쳐-테크놀로지의 선언문이었던 데뷔곡 ‘일곱 번째 감각’에서 퍼포먼스의 톤과 매너를 잡아주던 멤버였고, NCT에서는 유일하게 솔로곡(‘몽중몽’)을 NCT U의 이름으로 내보낸 바 있는 멤버이기도 하다. 길길이 날뛰는 전자음이 귀를 어지럽히는 선공개곡 ‘BAMBOLA’, 뭉근한 무드를 갖췄지만 나인 코드 음을 끈덕지게 짚는 멜로디와 다채로운 리듬 소스 운용으로 팽팽한 긴장감을 유지하는 타이틀곡 ‘STUNNER’. 앨범의 얼굴로서 상반된 스타일의 전위를 보여주는 두 트랙은 마치 ‘소방차’ – ‘무한적아’를 나란히 내놓던 NCT 127, 혹은 ‘Go’ – ‘Touch’를 연이어 공개하던 NCT 2018을 떠올리게도 한다. 이어지는 수록곡은 힙합/알앤비는 물론 아프로비트, 발라드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장르를 품고 있는데, 모든 곡이 (심지어 발라드 트랙마저) 오로지 텐의 퍼포먼스를 염두에 두고 선택된 것처럼 느껴진다는 점이 고무적이다. ‘SMP’의 ‘P’가 다름 아닌 ‘퍼포먼스’의 약자임을 상기한다면, 텐을 NCT의 ‘네오’를 넘어 SMP를 최전선에서 지키는 수호자라 할 수 있지 않을까.
마크 “The Firstfruit”
조은재: NCT라는 시스템 속에서 가장 치열하게 분초를 다퉈온 마크가 도달한 지점은 의외로 ‘본연의 뿌리’다. “The Firstfruit”은 젊고 재능있는 아티스트로서 마크가 가장 잘하는 것들을 가장 솔직한 방법으로 설명하고 있는 앨범이다. 유난히 프로모션에 신경 쓴 앨범이라는 점 또한 역설적으로 이 앨범의 준수한 퀄리티를 담보하는 증거가 되겠다. 타이틀곡 ‘1999’의 실험적인 면모가 전체 앨범에서 가장 도드라져보이긴 하지만, 앨범 전체는 오히려 2000년대 중후반쯤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재지한 질감의 묵직한 힙합으로 점철되어 있다. 가장 반가운 것은 앨범의 모든 부분이 마크의 자전적 서사와 마크의 취향, 마크의 특기, 마크 그 자체로 이루어졌다는 점인데, 이렇게 자전적 레퍼토리로 채운 힙합 앨범이야말로 2000년대에 ‘국힙’을 듣던 사람들에게는 너무도 익숙한 형태라서 충분히 반길만 하다. 역시 유행은 20년 주기로 돌아오는가. 그런 의미에서 “The Firstfruit”은 전통에 근거한 정공법이야말로 가장 트렌디한 포석일 수 있음을 일깨워주는 앨범이기도 하다.
라이즈 “ODYSSEY”
조은재: 라이즈가 모든 케이팝 팬덤이 수년간 메시아처럼 기다려온 ‘SM의 정통 남자 아이돌’임을 부정할 수 있는 사람은 이제 없겠다. 다만 “ODYSSEY”는 라이즈가 ‘정통’이되 ‘구태’는 전혀 아니라는 것을 단호하게 말해주는 앨범이다. 세계관의 존재감은 테마 키워드 제시 정도로 옅어졌고, 컨셉 상의 유기적인 연결성도 아직은 모호하지만, 그룹의 아이덴티티만은 그 어느 ‘SM의 왕도’를 걸어온 그룹들보다 확고하게 잡혀있다. SM이 힙합에 진심임을 부정할 수 없게 만드는, NCT를 계승하는 선공개 싱글 ‘Bag Bad Back’과 동방신기의 ‘Rising Sun’을 연상하지 않을 수 없는 ‘잉걸’을 통해 이 그룹은 누가 뭐래도 SM 안에서 이어져내려온 무언가를 수행해내고 있음을 강조한다. 그래서 타이틀곡 ‘Fly Up’에 와서 갑자기 로큰롤을 소환하는 것은 앨범의 흐름에는 어색해보여도 반드시 나와야 했던 포석이기도 하다. 앨범 한가운데에 배치된 ‘Passage’를 기준으로 앞쪽은 ‘SM 남돌’로서의 수행을, 뒤쪽은 데뷔곡 ‘Get A Guitar’부터 이어져온 ‘RIIZE다움’으로써 아이덴티티의 강조를 꾀하고 있는, 아주 영리한 앨범인 셈이다. 평상시보다 훨씬 뾰족하게 벼려진 소희의 보컬이 눈에 띄는데, 다른 보컬들이 상대적으로 부드러운 톤으로 받쳐주고 있어 팀 내에서 멤버 간의 균형을 잡아가는 과정 또한 눈여겨볼만 하다.
키스오브라이프 “224”
퀴비: 키스오브라이프의 디스코그래피는 상당 부분 알앤비 장르에 근거하고 있는데, 알앤비 뿌리가 강했던 여타 걸그룹과 비교해보았을 때에도 도드라지는 특징은 완숙한 로맨티시즘이다. S.E.S., 레드벨벳, 빌리 등은 주로 알앤비로 신비로운 이미지를 쌓아올리거나 우아한 질감을 부여하여 소녀의 복잡미묘한 세계를 그려냈다면, 키스오브라이프는 사랑과 해방의 메시지를 바탕으로 성숙한 여성의 낭만을 표현해낸다. 어쩌면 장르의 근원에 보다 더 충실한 접근법인 셈이다. “224”는 역대 발매작들 가운데 이러한 그룹의 특색을 가장 잘 집약해낸 앨범이다. 타이틀곡 ‘Lips Hips Kiss’와 후속곡 ‘Tell Me’는 사랑스럽고도 세련된 여성 화자의 세레나데를 들려주고, 수록곡에서는 ‘Heart of Gold’와 같은 진득한 레트로 알앤비를 소화하는 것은 물론 ‘k bye’, ‘Slide’ 등 알앤비와 근거리에 놓인 장르의 배합으로 활기를 불어넣는다.
때로는 성애적인 측면과도 결부될 수밖에 없는 완숙한 로맨티시즘을 표현하는 것이 케이팝 걸그룹으로서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이 업계에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도구화한 악례(惡例)가 많이 존재하고, 따라서 팬들부터도 이러한 콘셉트를 극도로 경계하곤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퍼포먼스에서 감지되는 한없이 상쾌하고 개운한 태도, 그리고 앨범 전반에 걸친 멤버들의 주도적인 참여는 이들의 음악을 오롯이 즐길 수 있게끔 한다. (그러한 면에서 장르는 달랐지만 과거 가인의 ‘피어나’ 같은 작품이 떠오르기도 한다.) 장르의 속성을 한껏 더 적극적으로 끌어들이고, 절묘한 균형 감각을 견지하며 이를 위화감 없이 절충해냈다고 평할 수 있겠다. 사실 문화 전유(cultural appropriation) 논란에 대한 해외 팬덤의 반발이 다른 케이팝 그룹에 비해 유독 거셌던 이유 중 하나는 이들이 이렇게 선보여온 음악이 꽤나 높은 블랙 뮤직 이해도를 보여주었기 때문이기도 할 테다. 작품 안팎으로 있었던 국내외 팬덤의 유효한 지적과 과한 매도, 그리고 서툴렀던 대처 가운데 제대로 조명 받지 못했지만, 분명 이 앨범의 빼어난 완성도를 이야기하지 않고 넘어가기는 아쉽다.
아르테미스 “⟨Club Icarus⟩”
랜디: 21세기를 2001년부터 센다면 올해가 사반세기가 된다. 아르테미스의 앨범은 가사, 비주얼 콘셉트, 음악이 모두 대표적인 세기말 작품들의 직계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불안하고, 혼란스럽고, 외롭고, 고장나있고, 헤매고 있는 사람들을 향한 앨범은 이들을 라는 한 공간에 불러낸다.
앨범은 1번 트랙 ‘Club for the Broken’과 2번 트랙 ‘Icarus’에서 불안감을 자아내는 모티프와 신경을 긁어대는 긴박한 샘플들, 클래시컬과 일렉트로닉 악기를 적절히 배합한 기묘한 밸런스로 앨범에서 하려는 이야기를 이미 거의 다 소화해낸다. 태양을 향해 날아올랐다가 날개가 녹아 추락했다는 그리스 신화 속 인간 이카루스의 신화는 표면적으로는 오만함이 불러온 비극적인 실패를 교훈으로 한다. 그러나 인간의 입장에서는 그래도 한 번은 날아서 태양 가까이 갔던 이의 낭만에 먼저 마음이 끌린다. 이달의소녀로 데뷔해 지금은 아르테미스가 된 다섯 명은 산업의 실패 이유로 대중의 눈 앞에서 커리어가 단절되는 어려움을 겪은 적이 있다. 그렇지만 한 번 떨어졌어도 불사조처럼 다시 태어나리라는 이들의 선언(“reborn like a phoenix wing”×4)은 이카루스가 떨어졌다는 사실보다는 날아오른 적이 있다는 것, 다시 날고 싶다는 열망에 마음이 가고 마는 사람들을 불러낸다. “⟨Club Icarus⟩”는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재목적화(repurposing) 하는 과정이다.
올해 있었던 이들의 ARTMS World Tour “Grand Club Icarus” 공연을 한 차례 보았다. 젠더노소 팬들이 천사와 나비 날개를 달고 한껏 치장한 채 베뉴를 빙 둘러 줄을 선 모습은 그 자체로도 장관이었다.
트와이스 “THIS IS FOR”
랜디: 트와이스는 어떤 장르를 딱히 표방하지 않는다. 그냥 케이팝이다. 장르의 인플루언스와 이름을 라벨처럼 활용 혹은 과시하는 지금 케이팝에서 트와이스는 어떤 장르에 더 가까이 다가가거나 더 그 장르의 ‘네이티브’처럼 보이려 애쓰지 않는다. 그냥 그 모든 사운드의 제일 위 레이어에 “케 이 팝” 이라고 크게 쓴다. 트와이스의 네 번쨰 정규 앨범 ‘THIS IS FOR’은 늘어난 영어 가사의 비중에도 화창하고 발랄한 케이팝의 형태를 한, 정석적인 케이팝 앨범이다. 어느 트랙 하나 특별히 튀거나 쳐지지 않고 14번까지 매끄럽게 흐른다. 트와이스 멤버들의 미소띈 목소리는 좋은 케이팝을 하는 보컬, 좋은 케이팝을 하는 랩을 들려준다.
과거 노컷뉴스의 기사에 (트와이스는) “매니악함을 겨루는 K팝 속에서 ‘순수하게 즐거움을 주는’, K팝의 정중앙 같은 노래를 제일 잘 소화하는 팀”이라는 코멘트를 드린 적이 있다. 이 팀의 일본과 대만 등 동아시아권에서의 인기는 익히 잘 알려져있었지만, 최근 몇 년 간 미국을 비롯한 서구권 인기가 급격히 치솟았다. 2010년대 3세대가 막 데뷔하던 시기 한국에서는 ‘서양 팬들은 “쎈 컨셉”을 좋아한다’는 막연한 추측이 있었고, 그래서 트와이스의 팝함과 발랄함은 아시아 시장을 겨냥한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오히려 그 점이 아이러니하게도 서구권의 팬들이 느끼는 아시아의 퀸, 가장 케이팝다운 케이팝 걸그룹을 만드는 특징이 되었다. ‘케이팝 데몬 헌터스’에 삽입된 트와이스의 ‘STRATEGY’는 영어곡이지만 트와이스의 목소리가 들리는 순간 이건 케이팝이다 싶지 않나. ‘THIS IS FOR’은 그 연장선상에 있으며, 이 기세는 좀처럼 꺾이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이브 “Soft Error”
비눈물: 미니 앨범 “Soft Error”는 스스로의 내면을 탐구했던 “I Did”을 지나 그 시선을 외부로 확장하며, 새로운 자아가 마주한 감정의 오류를 정밀하게 그려낸다. 또한 전작의 기조를 이어받아 음악적 문법을 한층 견고히 한다. 단순한 장르의 재현을 넘어 자연스럽게 체화된 일렉트로 팝과 하이퍼 팝에 집중하고, 프로듀싱을 주도한 IOAH의 감각이 앨범 전반에 깊게 투영되면서 전체적인 통일성과 완성도가 한층 높아졌다.
이번 앨범은 지난 앨범에서 음악적 실험을 거친 만큼 사운드 구현에서 주저함을 덜었다. ‘Do you feel it like i touch’, ‘Study’를 통해 본격적으로 과감한 방향성을 제시한다. ‘DIM’의 바이럴로 확장된 글로벌 영향력은 PinkPantheress, Bratty 등 색다른 아티스트와의 협업으로 이어졌다. 이때 타 아티스트의 색채에 기대기보다 이를 다양성을 보태는 장치로 유연하게 활용하며 앨범의 주도권을 유지했다.
이브는 리드 싱글 ‘White Cat’, ‘Soap’의 성공적인 안착으로 장르적 적합성이나 대외적인 영향력에 한 단계 더 가까워졌다. 다만 이와는 별개로, 이브는 이제 ‘왜 반드시 하이퍼 팝이어야 하는가’라는 질문 아래 고유한 당위성을 찾는 과정에 서 있다. 이브가 이번 앨범처럼 해답을 명쾌하게 제시할 수 있을지, 혹은 예상치 못한 새로운 돌파구를 만들 수 있을지, 즐거운 마음으로 기꺼이 다음 이야기를 기다리게 된다.
키 “HUNTER”
에린: 키의 정규 3집 “HUNTER”는 내면의 균열을 집요하게 파고든다. 타이틀 곡 ‘Hunter’는 서로 다른 자아들이 추격하고 부딪히며 하나가 되고자 하는 사투를 그려내며 앨범 전체를 관통한다. 이어지는 ‘Trap’은 어둠 속으로 침전하는 자아를 노래하고, 날카로운 고음으로 울부짖는 ‘Strange’는 존재론적 회의를 폭발시킨다. 이러한 내면적 충돌들은 고통에 매몰되지 않고 ‘GLAM’에 이르러 전환점을 맞이한다. ‘GLAM’을 통해 모순적인 자아를 그 자체로 받아들이면서 스스로를 ‘파티’ 그 자체로 선언하는데, 이는 고통스러운 자기 존재의 단면조차 화려함의 일부로 승화하는 강력한 긍정의 선언이다. 이러한 에너지는 앨범의 후반부인 ‘Perfect Error’, ‘Lavender Love’로 이어지며 자신의 실수나 결점에 너그러워지는 성숙함으로 마무리된다. 결국 “HUTER”는 자신의 심연을 직시하며 겪는 혼돈을 외면하지 않고 그 파편들을 자신의 일부로 받아들이며 화해하는 완결된 심리적 여정이다.
영파씨 “Growing Pain pt.1 : FREE”
랜디: 남의 집 아이들은 빨리 큰다더니, 영파씨는 볼 때마다 훌쩍 자라있어서 깜짝 놀란다. 분명 데뷔곡 ‘Macaroni Cheese’를 체크할 땐 그냥 끼 많은 아이들 같았고, 이 벌스는 괜찮게 하네 싶은 멤버는 하나에서 둘 정도였는데, 지금은 다섯 멤버가 모두 자기 몫을 넘치게 소화해낸다. 케이팝 역사상 힙합 스타일의 아이돌팝을 하는 걸그룹이 영파씨 하나는 아니지만, 영파씨는 전 멤버가 자신의 랩 파트에 대한 높은 이해도를 보여주는 아마도 거의 최초의 팀이다. 2016년, 아이돌로지의 미묘는 케이팝 걸그룹의 랩을 기성 랩과 같은 기준으로 평가할 수 없는, 아예 다른 목적과 효과를 노린 별개의 창작물이라는 뜻에서 ‘랩-액팅’이라는 단어를 제안한 바 있다. 나도 지금까지 케이팝 걸그룹의 랩 파트를 감상할 때 이 개념어에 기대어 그 효과를 충분히 즐겼고, 기성 랩과 같은 기준을 요구하지 않았다. 블랙핑크처럼 준수한 랩퍼 멤버를 보유한 걸그룹을 들을 때는 조금 예외이긴 했지만, 그럴 때 역시 팀 전체로 확장되지는 않았다. 그런데 영파씨가 “Growing Pain pt.1 : FREE”에서 달성한 퍼포먼스는 어쩌면 이러한 기대를 팀 단위로 걸어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어떻게 한 거지? 영파씨의 프로듀서 키겐의 비방(祕方)이 몹시 궁금해진다.
같은 평론에서 미묘는 “(걸그룹에게서 랩-액팅이 더 두드러지는 이유는) 걸그룹에게 공격성(‘드센 여자’)이 위험요소가 되기도 하고, 우리 대중이 걸그룹의 작가성(‘잘난 여자’)을 어디까지 수용할지 불분명하다는 점에서, 일종의 우회전략의 필요성”이라고 짚기도 했는데, 9년이 지난 지금 영파씨는 케이팝의 변방 지대에서 이 전략을 이미 폐기해버렸다. 마이크에 자기 톤을 살리는 개구진 공격성을 때려박고 있으며, 자동 기술 같은 왁자지껄 저마다의 이야기로 써내려가는 가사에 이들 작가성의 실마리가 보이기도 한다.
올드스쿨(‘FREESTYLE’), 레이지(‘YSSR’), 드릴(‘soju’) 등 힙합의 우산 아래 있는 장르라면 가리지 않고 샘플 테이스팅 하듯 게걸스럽게 도전하고 있기는 한데, 개인적으로는 이들의 올드스쿨 비트곡들이 가장 입맛에 맞는다. 좋아하면서도 조금 망설여진다. 그들 출생 전의 장르를 이렇게 잘 해도 되는가? 잘한다고 좋아해도 되는 걸까? 억지 섹슈얼함이 별로 없어 편히 좋아하고는 있지만, 그걸로 좋은 걸까? 2010년대 초반 크레용팝이 섹스어필 없이 엉뚱발랄 귀엽다며 ‘팝저씨’를 대량 생산하던 때처럼, 나는 소녀들이 옛날 장르를 어쩜 이렇게 잘 하냐며 좋아하는 ‘힙합줌마’가 된 것은 아닐까? 갈등하며, 그러나 참지는 못 하고, 상당히 좋아하고 있다.
해찬 “TASTE”
비눈물: NCT 노래를 들으면서 종종 ‘오?’ 하고 감탄하며 누군지 확인하게 되는 순간이 있다. 그럴 때마다 마주하는 해찬의 보컬은 가지각색의 목소리 사이에서도 북극성처럼 늘 반짝이며 NCT 127과 DREAM 두 팀에서 상징적인 음색으로 존재감을 보여왔다. 하지만 해찬은 다재다능함에 머무르지 않고, 알앤비와 소울 장르의 대가인 디즈와 소울트리 팀의 전면적인 지원을 받아 자신의 목소리가 품은 장점을 극대화하는 데 집중한다.
스튜디오에서 베이스 리프를 흥얼거리며 시작하는 ‘Camera Lights’는 아티스트가 의도한 앨범의 테마를 단숨에 각인시킨다. 이어지는 리드 싱글 ‘CRZY’는 변화무쌍한 리듬 위를 능숙하게 유영하며 감각적인 퍼포먼스와 고해상도의 보컬을 동시에 드러낸다. ‘ADRENALINE’과 ‘Roll With Me’ 등 수록곡은 강렬함과 여유를 자유롭게 오가며 사계절을 품은 듯한 해찬의 보컬 스펙트럼을 펼쳐 보인다.
후반부에 이르러 꽉 붙잡은 긴장을 풀고 보컬 본연의 질감을 가감 없이 투영한 정통 알앤비 ‘Should Be’는 극적인 대비와 함께 앨범의 하이라이트를 장식한다. 잿빛 봄을 그리는 ‘Grey Rain’으로 앨범을 잔잔하게 매듭지을 수도 있었지만, 해찬은 대신 첫 곡의 멜로디를 흥얼거리며 스튜디오의 뜨거운 열기로, 초심으로 되돌아간다. 이러한 순환 구조는 청자를 깊숙이 몰입시켜 앨범의 스토리텔링에 단단한 설득력을 부여한다.
“TASTE”는 제목 그대로 해찬의 취향을 깊게 파고들어 그 맛을 온전히 담아내고자 하는 긍정적인 고집과 욕심을 통해 해찬의 솔로 아티스트로서의 가능성을 증명한다. 나아가 모든 단위가 점점 짧아지는 현 케이팝 산업의 흐름 속에서도 인트로, 간주곡과 아웃트로 등 정규 앨범만이 가질 수 있는 유기적 장치들을 영리하게 활용하며 완결성과 당위성을 놓치지 않는 ‘정규 앨범’의 본질적인 가치를 다시금 조명한다.
채영 “LIL FANTASY vol.1”
퀴비: 자기 전시의 시대, ‘취향이 곧 재능’이란 말이 심심찮게 쓰이곤 한다. 채영의 솔로 데뷔 앨범 역시 그러한 평을 들을 법한 앨범이다. 그러나 이 앨범이 두루뭉술한 정체불명의 ‘느낌 좋은’ 취향 정도로만 해설된다면 부당할 것이다. 이 앨범은 단순히 ‘취향’을 넘어 ‘취향을 지키는 것’에 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못나 보이는 과일을 땅속에 숨겨버리겠노라 말하는 ‘Avocado’로 시작해 먼지 쌓인 기타를 다시금 꺼내드는 ‘내 기타’로 맺어지는 이 앨범은 채영이 자신의 취향을 마주하며 어루만지는 성찰일지와도 같다. 사운드, 가사, 가창에 이르기까지 앨범 전반에 위태롭고 음울한 기운이 감돌지만, 자신의 유약한 구석을 기꺼이 꺼내보이며 이를 애정 어린 시선으로 응시하는 데에서는 도리어 굳건함이 느껴지기도 한다. 자신을 과시적으로 드러내야 하는 만큼 역설적으로 자신을 감춰야 하는 아이돌-연예인의 위치를 상기한다면 이 앨범의 서사가 더욱 남다르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이 앨범에 ‘vol. 1’이라는 꼬리표를 단 만큼, 채영이 조심스레, 그리고 고집스레 가꿔온 비밀정원을 앞으로도 더 확인할 기회가 생기기를 바란다. 어지러이 붕괴하는 사운드 가운데 “걸어야지”라며 신발끈을 바짝 묶는 ‘Ribbons’, 서글픈 비밀의 난장을 펼치는 ‘그림자 놀이’는 이 정원에서 가장 아름답게 피어난 덩굴꽃이다.
엔믹스 “Blue Valentine”
예미: 엔믹스의 첫 정규앨범 “Blue Valentine”은 걸출한 성량과 기교로 노래의 역동성을 두세 배 더하는 멤버들의 기량을 완벽히 펼쳐낸 판이다. ‘Blue Valentine’이라는 야트막한 문턱을 넘어 ‘SPINNIN’ ON IT’에 홀리는 순간, 청자는 믹스토피아로 향하는 엔믹스의 모험을 자신도 모르게 따라가게 된다. R&B, 일렉트로니카, 레게톤, 록 등 팝의 테두리 안에 있는 다양한 장르를 차용하면서도 힘 준 드럼을 중심으로 타협 없이 맥시멀한 사운드를 연출하고, 이 위에 고저차가 큰 멜로디를 힘 있으면서도 자유롭게 다루는 보컬을 얹어 발산의 이미지를 완벽하게 그린다. 이처럼 멤버의 가창력을 필두로 고난도의 트랙을 돌파하는 구성의 케이팝 작품은 여럿 있었지만, 적지 않은 수의 멤버를 두면서도 묵직한 톤을 가진 각 보컬리스트들의 개성을 코러스보다 앞세워 목소리의 힘으로 댄서블함을 극대화하는 것은 보컬 기량을 내세우는 케이팝 작품 중에서도 분명 독특한 지향점이다.
이렇게 목소리를 통해 에너지를 그리는 현재의 엔믹스를 보여주는 앨범 말미에는 데뷔곡 ‘O.O’의 두 파트가 실려 그룹의 시작점을 돌이켜보게 한다. 복잡다단한 음악을 통해 에너지를 폭발시키겠다는 초심이 지금만큼의 설득력을 갖추기까지의 과정을 회상하며 청취를 마치고 나면, 그 방향성을 유지하며 끝끝내 궤도에 오른 그룹의 현재가 뭉클하게 다가온다. 엔믹스가 현재의 엔믹스가 되기까지의 과정을 기념하고 이에 방점을 찍는다는 점에서 “Blue Valentine”은 아이돌 정규 앨범의 역할에 충실했다고 볼 수 있겠다.
하츠투하츠 “FOCUS”
비눈물: 타이틀 곡 ‘FOCUS’는 런웨이를 연상시키는 규칙적인 건반 사운드와 그에 부합하는 절제된 퍼포먼스가 결합되어 정교한 미학을 선사한다. 보컬 측면에서는 일부 구간을 제외하고 음가 변화를 최소화한 챈트 방식의 싱잉을 택하고, 디스코 영향을 받아 리드미컬한 베이스 라인으로 곡의 골격을 세운다. 마지막 후렴구와 아웃트로에 이르기까지 화려한 애드리브 대신 코드와 악기의 변주에 집중하는 대목에서 이 곡이 추구하는 철저한 구조적 설계가 돋보인다. 그 가운데, 간헐적으로 터져 나오는 풍부한 화음이 마치 오아시스 같은 청량감과 쾌감을 더한다. 도입부의 엇나간 듯 들리는 피아노 한 음마저 청자의 주의를 단숨에 사로잡는 장치로 작용하며, 하츠투하츠가 데뷔부터 그려온 청사진을 완성하는 매력적인 트랙으로 자리 잡는다.
데뷔 후 첫 EP인 만큼 앨범 구성도 매우 짜임새 있다. 타이틀 곡에서 아껴둔 보컬의 에너지는 ‘Apple Pie’의 도입부부터 풍성한 화음과 백보컬로 전이되며 하츠투하츠만의 감성적 본질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이어지는 ‘Pretty Please’는 1세대 S.E.S.의 향수를 세련되게 소환하고, ‘Flutter’는 레드벨벳이 보여준 풍성한 화법을 동시대적으로 재해석하며 다채로운 보컬 레이어를 쌓아 올린다. 데뷔 싱글의 몽환적인 알앤비 무드를 계승한 ‘Blue Moon’까지 포함해, 선배 그룹들의 음악적 유산을 유효한 투명도로 반영하면서 자신들만의 색채로 소화해 내는 능력이 탁월하다. 여기에 ‘STYLE’에서 보여준 하츠투하츠만의 통통 튀는 유니크함까지 더해지며, 전 세대를 아우르는 매력과 함께 이들의 무한한 가능성을 설득력 있게 제시한다.
엑스러브 “UXLXVE”
퀴비: 앨범을 반복해 들을수록 문득 이 EP가 의외로 꽤나 슬픔의 감정을 자극하고 있다는 걸 느꼈다. 더블 타이틀곡 ‘Rizz’와 ‘Biii:-P’은 정반대의 방향으로 화려한 스타일링과 퍼포먼스를 과시하지만, 바짝 힘이 들어간 가사에서는 오묘한 긴장감이 느껴지고 텅 빈 공간감을 지닌 사운드에서는 쓸쓸함이 느껴진다. 한껏 더 차분하고 정돈된 톤의 수록곡들은 이러한 인상을 더욱 강화한다. 이를 테면 Charli XCX나 키라라와 같은 일렉트로닉 댄스 뮤직 아티스트의 음악이 신나면서도 묘한 애수를 자극하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다. 사실 이러한 ‘웃음으로 눈물 닦기’는 숱한 (댄스) 음악의, 그리고 퀴어 문화의 본질을 관통하는 것이도 하다. 자유와 연대에는 고독이 선행되거나 또는 수반되기에, 자유와 연대를 노래하는 이들의 음악에 슬픔이 핵심적인 감정으로 자리하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하다. 그러나 이러한 슬픔은 여러 타인들을 묶어주는 공감의 매개가 되는 법. 이들의 음악에 동참하는 팬들이 늘어나고 있는 것은 그에 대한 방증이 아닐까. ‘슬픈 존재들이여, 함께 춤을 추자.’ 엑스러브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결국 이것인 것만 같다.
선미 “HEART MAID”
마노: 본작은 크게 두 파트로 구성되어 있다. 오프닝 트랙 ‘MAID’를 위시한 전반부와, 베이스 사운드가 전면에 배치되어 있는 ‘Bass(ad)’를 내세운 후반부. 타이틀곡 ‘CYNICAL’에서 선미는 이전 디스코그래피에서 종종 선보여온 소위 ‘곱게 미친 여자’를 특유의 희번덕이는 광기로 훌륭하게 연기해보이고, 레트로한 향취가 가득한 ‘Sweet nightmare’, 디스코팝 ‘뚜뚜’, 유혹적이지만 어딘가 스산한 ‘미니스커트’, 느른하고 센슈얼한 ‘Tuberose’ 등의 수록곡에서 ‘어른 여자의 광기’를 폭넓게 선보인다. 슬슬 공기가 달아올랐을 즈음 베이스 연주 트랙 ‘Bass(ad)’로 한번 흐름을 환기한 뒤, 선공개 트랙 ‘BLUE!’로 후반부를 열며 완전히 다른 표정을 지어보인다. 전반부가 어딘가 히스테릭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면, 후반부는 굳이 이름 붙이자면 다소 멜랑꼴리하다고나 할까. 전반적으로 밴드 사운드가 도드라지는 가운데, 상대적으로 업템포인 ‘Balloon in Love’를 제외하면 거의 모든 수록곡이 느릿하고 조곤조곤하게 흘러간다. 가장 후반부에 배치된 ‘Happy af’, ‘새벽산책’, ‘Bath’, ‘긴긴밤’ 등의 트랙은 청자에게 넌지시 위로와 메시지를 건네고 있는데, 당초 아티스트가 앨범을 만들며 의도했다는 “마음을 어루만지는” 목적에 가장 부합하고 있다는 점에서 본작의 백미라고 해야 하지 않을지. 앨범명에서 의도한 바처럼, 온 마음(HEART)을 다해 만들어 낸(MADE) 최정점의 수작이라 할 만 하다.
저스트비 “SNOW ANGEL”
마노: 전작 “JUST ODD”에서 타이틀곡 ‘CHEST’를 통해 음악적 방향성의 변화를 보이긴 했으나, 전체적으로는 장르가 다소 혼종적이고 유기성이 결여되어 있었던 탓에 끝내 아쉬움이 남곤 했었다. 그런 아쉬움을 상쇄하기라도 하듯 본작에서 저스트비는 시종일관 하이퍼 팝으로 시원하게 내달리며 완전히 새로운 2기를 열어젖힌다. 6곡의 모든 트랙이 하이퍼 팝으로 구성되어 있으되, 적절한 변화구와 변별점을 두며 지루할 틈이 없도록 안배했다. 시작하자마자 160BPM으로 스피디하게 질주하는 ‘SWEATER’, 청아하고 몽환적인 ‘SNOW ANGEL’, 다이내믹한 신스 사운드가 듣는 재미를 배가하는 ‘TRUE HEART’, 정통 팝의 색채가 짙은 ‘FREEDOM’, 전곡 중 가장 업템포인 선공개 트랙 ‘GOING SOUTH’, 격정으로 치닫으며 피날레를 화려하게 장식하는 ‘BHYT’까지 모든 트랙이 일관적으로 준수한 완성도를 유지하고 있으면서 장르적으로도 단단한 유기성을 갖추고 있다. 하이퍼 팝이라는 장르가 다소 생소할지라도, 혹은 저스트비를 아직 잘 모른다고 할지라도, 놓치면 앞으로가 두고두고 아쉬울 웰메이드 EP.
리센느 “lip bomb”
비눈물: 리센느는 ‘향기’라는 팀의 핵심 콘셉트에 충실하면서도 자신들만의 음악적 영역을 점차 확장하고 있다. 전작들의 시도를 정교하게 다듬어 전면으로 내세운다. ‘in my lotion’의 리듬감이 ‘Heart Drop’으로 이어지면서 매혹적인 이미지로 확장되고, ‘Glow Up’과 ‘Deja vu’에서 보여준 특유의 공간감과 감성이 ‘Bloom’으로 연결되는 방식의 유기적인 흐름이 강조된다. 또한 톡톡 터지는 ‘베리’를 메인 테마로 삼아 멤버들의 보컬 활용도가 이전보다 확장되어, 앨범 전반에서 목소리가 한층 자유롭고 시원하게 뻗어 나가며 해방감을 부여한다.
“lip bomb”은 데뷔 당시 느꼈던 예상치 못한 신선함을 상기시키면서 동시에 그룹의 안정적인 이미지를 구축하여 단단한 토대를 마련한다. 다만, 앞으로 그룹에 필요한 것은 보편적인 준수함을 넘어선 ‘특별함’을 이끌어 내는 일이다. 데뷔 앨범이 선사했던 충격에 걸맞는 과감함이 동반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MVP’에서 보여준 신시사이저 사운드 메이킹과 멤버들의 보컬 능력치는 이미 충분한 잠재력을 갖추고 있음을 증명한다. 데뷔부터 꾸준히 보여온 퀄리티에 대한 진정성 있는 고집이 그룹의 롱런을 뒷받침하는 확실한 동력이 되기를 기대한다.
- 결산 2025 : ③올해의 앨범 20선 - 2025-12-31
- 결산 2025 : ②올해의 노래 20선 - 2025-12-30
- 결산 2025 : ①올해의 신인 10선 - 2025-12-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