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그룹 댄스 미학

이미지 ⓒ 멜론 뮤직 어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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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2018년 3월 23일부터 25일까지 서교예술실험센터에서 진행된 〈한 줄도 쓰지 않았어요〉(기획 박준우, 전대한)에 전시된 원고를 일부 수정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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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연말 가장 화제가 되었던 이벤트였던 멜론 뮤직 어워드는 알찬 라인업과 군더더기 없는 진행, 그리고 화려한 무대로 많은 케이팝 팬들에게 호평을 받은 시상식이었습니다. 저 역시 고척 스카이돔의 취재석에서, 한 해를 빛낸 아티스트들의 무대가 하나씩 진행될 때마다 뜨거워지는 현장의 분위기를 직접 체감했습니다. 가수들이 정성껏 준비해온 특별 무대에 흥에 겨워지던 중, 전체 식의 중간쯤 지났을 때였을까요. 문득 무대 간의 이상한 이질감이 느껴져 잠시 몸을 조금 뒤쪽으로 젖히고 곰곰이 생각하며 무대를 응시했습니다. 전 세계를 뒤흔든 그야말로 ‘빅네임’인 남자 아이돌 그룹 엑소와 방탄소년단의 무대가 척 보기에도 어마어마한 규모와 완성도를 자랑하는 동안, 여자 아이돌인 레드벨벳의 무대는 심지어 눈에 띄는 무대 장치조차 없이 멤버들만 맨몸으로 나와 소화했기 때문입니다. 우산을 들고나와 잠깐 소품으로 활용한 여자친구와, 인형의 집을 연상하게 하는 세트를 연출한 트와이스도 있었지요. 하지만 데뷔한 지 반년도 채 되지 않은 신인 남자 아이돌인 워너원과 JBJ의 무대가 이어지는 것을 보자면, 그 격차가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이었습니다. 똑같은 댄스 팝 장르에 엇비슷한, 혹은 심지어 더 낮은 연차인데도 남자 아이돌의 무대 연출에 더 큰 공을 들여놓은 것이죠.

많은 대중음악 장르 중에서도 아이돌 팝은 특히 ‘보는 음악’이라는 점이 강조됩니다. 귀로 듣는 음악 못지않게 눈에 보이는 퍼포먼스 혹은 비디오가 큰 부분을 차지하고, 심지어 음악만으로는 미완이지만 시각적인 퍼포먼스로써 비로소 완성되기도 하는 것이 아이돌 팝 장르입니다. 그러므로 아이돌 무대에서 시각적인 연출은 결코 ‘껍데기’에 불과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상향 평준화된 연말 시상식에서 보인 성차는, 단순히 콘셉트의 차이만으로는 보기 힘들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시상식에 등장한 남자 아이돌은 모두 하나같이 ‘멋있음’을 보여주기 위해 총력전을 펼쳤습니다. 완벽한 무대를 만들기 위해 연습실에서 긴 시간의 청춘을 불태우는 아이돌 한 명, 한 명에야 성차가 어디 있을까요. 그러니까 사실 그 ‘보여주기’를 하는 사람은 결국 기획, 제작자와 연출가인 것입니다. 제작진은 ‘멋있는 남자 아이돌’을 보여주고 싶어 했고, 여자 아이돌은 굳이 멋있지 않아도 된다고 믿는 듯했습니다. 딱 한 사람, 대상 수상자였던 아이유 정도가 예외였을까요. 아이유가 놓인 아티스트와 아이돌의 경계의 모호한 위치, 그리고 ‘대상’의 가치를 생각해본다면 충분히 예외로 둘 만할 것입니다.

재작년 여름 방송된 엠넷 〈힛더스테이지〉에서 트와이스의 모모는 발군의 춤 실력과 수준급의 연기력으로 수많은 이들을 매료시켰습니다. 최애 남돌을 보기 위해 엠넷을 틀어두었던 팬들조차도 방송이 끝나자마자 모모의 무대에 대한 호평과 찬사를 표현하며 큰 관심을 보일 정도였죠. 단순한 동작 위주로 무대에 서는 일본 ‘아이도루’보다, 일본 스트리트 댄스팀에서 활동할 때처럼 멋있는 춤을 추는 한국의 아이돌을 택한 모모는, 바라고 준비해온 대로 멋진 춤으로 시선을 끌었습니다. 트와이스의 최근 활동곡이었던 ‘Likey’에서는 전에 없던 독무 댄스 브레이크를 선보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모모가 속한 트와이스는 데뷔 때부터 지금까지도 다른 여자 아이돌에 비해 쉽고 간단한 안무를 유행시키는 것으로 유명한 팀입니다. 특히 트와이스 최대 히트곡이었던 ‘Cheer Up’과 ‘TT’는 아이러니하게도 트와이스의 모든 안무 중 가장 낮은 난이도를 자랑하며, 초등학생 장기자랑에서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는 안무입니다. 물론 곡 자체가 워낙 크게 히트했기 때문에 더 많은 이들이 따라 할 수밖에 없기도 했지만, 과연 트와이스의 안무가 훨씬 복잡하고 어려웠다면 이만큼 히트할 수 있었을지 의심이 들 수밖에 없는 것도 사실입니다.

이쯤에서 다시 한번 잘 떠올려보세요. 최근 크게 히트한 남자 아이돌의 노래 중에, 쉽고 간결한 포인트 안무로 남녀노소 모두가 따라 추었던 춤이 있었나요? 원더걸스의 ‘Tell Me’, 크레용팝의 ‘빠빠빠’, 트와이스의 ‘Cheer Up’이 나오는 동안, 남자 아이돌에게도 이렇게 쉽고 단순한, 누구나 출 수 있는 안무가 주어졌을까요? 그러면 이제 반대로 질문해보겠습니다. 남자 아이돌들이 아무도 흉내 낼 수 없을 만큼 과격하고 화려하고 스킬풀한 퍼포먼스를 선보이는 동안, 그리고 그 퍼포먼스를 소화해내기 위한 그간의 노고에 대해 찬사를 받는 동안, 여자 아이돌에게 그만큼 ‘멋있는’ 퍼포먼스가 주어진 적이 있었나요? 남자 아이돌이 예능 프로그램과 각종 공연장에서 “샤샤샤”나 “너무해, 너무해”를 따라 하는 동안, 여자 아이돌은 그에 비해 얼마나 자주 ‘으르렁’이나 ‘피 땀 눈물’을 추었나요? 어째서 여자 아이돌은 퍼포먼스의 질적 성장에 앞서 대중적인 인지도와 인기를 추구하게끔 기획될까요?

다시, 꿈 많은 여자 아이돌의 이야기입니다. ‘국민 프로듀서’에 의해 발탁된 I.O.I 멤버이기도 했던 위키미키의 최유정은 그 누구보다도 남자 아이돌 안무를 완벽히 커버해내는 멤버입니다. 남자에 비해 작은 체격과 약한 근력에도 그 어느 남자보다도 격렬한 춤을 잘 소화해냅니다. 하지만 남자 아이돌의 춤 자체가 ‘아는 사람이 보아야’ 멋있어 보일 정도로 고도화되어 있기 때문에, 최유정이 남자 안무도 소화할 만큼 높은 수준의 춤 실력을 갖추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커녕 알 수 있는 사람도 그다지 많지 않아 보입니다. I.O.I에는 춤을 수준급으로 잘 추는 멤버가 한 명 더 있습니다. 어느새 음원 강자로 떠오른 청하 역시 〈힛더스테이지〉에서도 보여준 바 있는 파워풀한 퍼포먼스를 무기로 하는 아티스트입니다. 하지만 정작 두 사람이 I.O.I로 활동했을 때 가장 많이 췄던 안무는 ‘Dream Girl’과 ‘너무 너무 너무’, 그리고 아마 제자리에서 추게 되어있는 ‘Pick Me’였을 것입니다.

누군가에겐 너무나 당연한 얘기지요. 대중이 원하는 친근한 여자 아이돌로서 히트하려면 어렵고 복잡한 무대보다 쉽게 각인되는 장치들을 앞세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게 쉬운 길이라고 막연히 믿게 된 것이지요. 화려하고 카리스마 있는 퍼포먼스를 선보인 여자 가수들은 있었지만, 그렇게 만들기는 너무 어렵고, 그렇게 만든 가수를 히트시키기는 더더욱 어렵다고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디바는 태어나지만 아이돌은 프로듀스 된다고 생각하게 되는 모양입니다. 그렇게 이효리, 보아, 소녀시대, 2NE1을 묻어버리고, 트와이스와 I.O.I를 만들었습니다. 오해하지 마세요. 정작 트와이스와 I.O.I 멤버들이 늘 꿈꿔왔던 롤모델은 바로 저 ‘멋있는’ 여자 아이돌입니다. 분명 이들의 역량은 롤모델이라던 이전 세대보다 훨씬 진화했습니다. 그래서 더욱 이들은, 어째서 ‘멋있음’은 갈수록 요원해지는 듯한지, 그게 혹시라도 자기 탓은 아닐지 자책하고 고민하는 중일지도 모릅니다.

여자 아이돌의 춤을 ‘벌칙’으로 희화해 소화하는 남자 아이돌을 비판하는 사례가 요즘도 종종 보이곤 합니다. 다른 아티스트의 어엿한 작품을 함부로 희화하는 것은 분명 잘못된 발상에서 나온 행동입니다. 하지만 그 전에, 똑같이 어색하게 소화해도 왜 여자 아이돌이 추는 어설픈 남자 아이돌의 춤을 보고서는 아무도 웃지 않는지, 왜 남자 아이돌은 여자 아이돌의 춤을 진지하게 잘 커버해도 한쪽에서 킥킥거리는 소리를 들어야만 하는지, 좀 더 고민해보면 이것이 단순히 아이돌 본인들의 태도 문제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객관적으로, 남자 아이돌의 춤은 어렵고, 여자 아이돌의 춤은 쉽습니다. 같은 사람이 두 가지를 동시에 췄을 때 그 차이는 더 극명하게 보이고, 그래서 한 쪽이 더 평가 절하되기 쉬운 것입니다. 처음부터 설계되어 있었던 그 차이를, 우리도 모르게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에 ‘웃음’이 나오는 것이지요.

사람들이 나빠서 여자 아이돌을 낮추어 보는 것이 아니라, 여자 아이돌을 얕잡아 보게끔 누군가가 만들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이것을 깨닫는 순간 ‘멋있음’을 추구하고 싶었던 여자 아이돌이 느낄 좌절감. 이것이 비단 ‘아이돌’과 ‘춤’에만 국한되어 있지는 않을 것 같다는 예감. 연중 가장 중요한 무대라는 시상식에서 이 모든 것을 단박에 목도했을 때의 참담함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누가 뭐래도 여자 아이돌은 살아남아야 하고, 살아남은 뒤에도 존재해야 하니까요.

조성민

Author:

인생에서 재미없는 것들을 소거하고 나니 아이돌 밖에 남지 않아서, 아이돌과 관련한 일이라면 무엇이든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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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년의 노래

    최근 본 글 중 가장 인상 깊은 글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 그래서 저는 CLC 블랙 드레스를 좋게 봤구요. 케이콘 재팬에서 구구단은 쩔어 커버를 잘 소화했죠. 이런 컨셉을 내려면 걱정하게 되는 게 남자 팬덤이죠. 대표적으로 트와이스의 경우 남자 팬 비율이 높은 팀이구요. 한편, 솔직히 말하자면 격렬한 퍼포먼스를 팀 전체가 완벽히 할 수 있는 걸그룹이 얼마나 될 지 의문이기도 합니다. 애초에 포지셔닝의 차이일 수도 있지만요. ioi 출신 중 청하의 음악적 성과가 현재 가장 좋은 건 아이러니일까요. 청하 또한 아이돌과 아티스트의 경계에 있는 바, 양쪽에 요구되는 능력이 다른 걸 수도 있구요.
    여자 아이돌은 남자 아이돌에 비해 팬덤의 화력이 약하기 때문에 대중성을 추구할 수 밖에 없는 점도 있죠.

    • 소년의 노래

      그렇다기에는 투애니원 , 소녀시대(후기), (애매하지만)레드벨벳, 마마무. 과거에는 베이비복스나 디바 등 남성향에 최적화하지 않더라도 걸그룹도 충분히 경쟁력이 있다는 사례가 많습니다. 물론 인기 넘버원은 트와이스입니다만 그렇게까지 왜곡된 여성성을 재현해가면서 얻은 인기는 한계가 뚜렷할 거라 봅니다.

      • 남성향 팬덤의 강세는 한국 한정 트와이스가 이례적이긴 했죠. 남성향 최적화(?)라기 보다는 대중성의 문제라고 보는데요. 소녀시대, 레드벨벳도 한국 한정 인기를 얻었던 노래는 그쪽에 가깝구요.트와이스도 언젠가는 변화를 줘야겠습니다만, 일본 활동을 고려해서라도 그런 성향을 유지하는 것이겠죠.

      • 소녀 컨셉에 대하여 참고할 만한 일본 사례를 든 6년 전 기사 http://www.entermedia.co.kr/news/news_view.html?idx=1072

  • 키위

    멋있음을 추구하고 싶은 걸그룹이 느끼는 좌절이라는 말이 와 닿네요. 이전에 브리트니 스피어스의 공연을 좋아했었는데 어린소녀임에도 불구하고 힘찬 춤동작이 멋졌다고 생각됬거든요. 걸그룹 가수들 본인이 아닌 그 회사들에게 이런걸 시도해주십사 라고 바라는게 조금 슬픈현실…걸그룹 화이팅

  • eislk

    글 전반적으로 공감합니다. 걸그룹들의 실력이 충분한데도 보여줄 수 있는 것이 ‘걸그룹’이라서 한정되어 있는 느낌입니다.

  • Jason Y

    멋있음이 아이돌 음악에서 표현해야 하는 최고가치라는 꽉막히고 고리타분하고 무식하면서도 이 용감한 편견은 뭐지…ㅋ 아이돌 전문가라는 사람들… 주제에 어설픈 줄세우기 하려는 그 허위의식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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