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C 에브리원 〈비밀병기 그녀〉
이 방송은 ‘덕후’를 노린다고 한다. 캐치프레이즈부터 ‘덕후몰이 버라이어티’다. MC인 데프콘은 덕후를 사랑한다는 티셔츠까지 입고 나오고, 심사위원단의 명칭도 ‘덕후 판정단’이다. 아무튼 덕후밭이다. 여러 가지 덕후가 있겠지만, 걸그룹 멤버들을 10명이나 불러 모았으니 걸그룹 덕후 방송이길 기대해도 좋을 것이다.
스피카, 헬로비너스, 투아이즈, 스텔라, 라붐, 여자친구 등, 정상의 걸그룹들은 아니다. 개중에는 의외의 이름들도 있지만 상대적으로 주목을 덜 받은 팀들이라 뭉뚱그릴 수 있다. 어쨌든 걸그룹 시장의 경쟁이 치열한 것은 기정사실이다. 올여름은 대규모의 걸그룹 컴백이 예정돼 있기도 하니 그 틈새에서 방송 분량을 확보하는 것만으로 나쁠 것은 없어 보인다.
출연진의 면면이 이러한 바, 무거운 분위기의 잔혹한 서바이벌을 우려했다면 이 방송의 가벼운 터치에 마음이 놓이는 구석도 있다. 출연진에게 주어지는 미션도 실력이나 존재의 의미를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소개에 가깝다. 입대 장병들에게 사진을 나눠준다든지, 직접 제작한 동영상으로 자신의 캐릭터와 매력을 보여준다든지 하는 식이다. 음악적 요소 역시 ‘음색’을 본다고 한다. 데뷔 연차와 무관하게, 이들은 신인에 가까운 자세로 다뤄진다. 이 역시 출연진들에게 비극적인 절박함을 강요하지 않을 수 있는 요소로 이해된다.
그런데 이 방송은 묘하다. ‘주제’가 되는 걸그룹 멤버 10명이 스튜디오 한쪽 벽면의 2층으로 이뤄진 박스 안에 들어서 있다. 예능에서 특정 인물이 두각을 드러낼 때에는 개인적 활약인 경우도 많지만, 다른 출연자와의 ‘케미’도 중요하다. 방송 중 몇 번 다른 출연자에 대해 언급을 요구하는 대목이 있지만, 벽으로 나뉜 출연자들은 상호작용을 거의 하지 않는다. 이들은 각자 고립된 채 MC들과 평가단을 마주하고 있다. 그 대목에서, 각자의 매력을 어필하는 형태의 코너들은 전부 ‘평가단의 마음에 들기’를 노골적으로 목표하게 된다.
‘노잼 버튼’을 손에 쥔 평가단은 덕후라고 소개된다. 덕후 방송이라니 덕후의 마음에 드는 것이 곧 방송의 취지에도 부합하는 것이리라. 하지만 몰입도보다는 섹시 안무나 패러디 등 ‘일반인’ 스탠다드에 가까워 보이는 “3분 덕후만족 동영상”을 비롯해, 이 방송은 그다지 ‘덕스럽게’ 진행되지 않는다. 대신에, 출연자들의 지위를 깎아내린다.
5명씩 늘어서서 한 곡을 돌려 부르는 “음색 돌림 노래방” 코너가 대표적이다. 각자의 음색을 어필한다는 취지인데, 이 코너에서 출연자들은 이미 가수가 아니다. 노래방 반주는 차치하고, 무대에는 어떠한 모니터 장비도 없다. 모니터 없이 노래한다는 것은 반주를 제대로 들을 수 없어 음정과 필을 잡기 힘들다는 의미이며, 또한 자신이 노래하는 음색을 살피기도 힘들다는 것이다. 심지어 음색을 더 잘 들어보겠다는 명목으로 반주의 볼륨을 낮추기까지 하는데, 이런 상황에서 정상적으로 노래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차라리 무반주였다면 자기 템포와 음역으로 노래할 수 있었겠지만, 이 방송에서는 들리지 않는 반주에 ‘맞춰서’ 불러야 한다. 결국 출연자들은 노래방의 일반인보다도 훨씬 못한 컨디션에서 노래해야 한 것이다. 가창력을 강조하는 멤버들은 아니라지만 이날 이들의 노래가 참담했던 것은 전적으로 제작진의 책임이다.
‘음색만 보겠다’는 취지라 해도 마찬가지의 어불성설이다. 음색은 성량에 크게 영향을 받기에, 안정적인 성량을 낼 수 없는 상황은 음색을 보여줄 수 없다. 음역 역시 중요한데, 하나의 곡을 정해진 파트대로 나눠 부르면서 서로 다른 음역을 노래하고, 남자 키의 곡을 임의로 이조해 부를 때에는 음색에 대한 어떠한 고려도 불가능하다. 평가단도 결국 열창과 안정성에 점수를 많이 준 것은 어쩔 수 없는 결과였다.
이렇듯 핑계에 불과한 음색 테스트로 노래를 시키는 것은, “가수야? 노래 한번 해봐”하고 요구하는 술자리 아저씨들의 모습으로 수렴한다. 10명의 출연자가 늘어선 모습도 판정단의 선택을 기다리며 진열된 상품에 다름 아니다. 서바이벌 형식임을 뒤늦게 밝히면서 출연진들 사이에 동요가 일자 한 MC는 “누가 반말했어?”라고 (자신은 반말로) 연거푸 묻는다. MC들은 10명의 이름도 미처 외우지 못해 그룹 이름으로 부르거나 잘못 부르기도 한다. (타히티를 “타이티”라 표기하는 자막도 나온다.) 이 방송이 출연진을 대하는 태도는 모든 면에서 무례하다.
언제부터 방송용어에 편입됐는지는 알 수 없으나 ‘병맛’ 예능이라 MC가 서두부터 선언했다. 그러니, 롤모델로 수지를 선정한 것과 실제 코너 내용에 개연성이 없는 등의 엉성함은 그저 이 방송의 허술한 완성도로 이해하면 그만이다. 그러나 ‘덕후몰이’라 천명한 방송이 걸그룹 멤버들을 동원하고 보여주는 방식이 드러내는 ‘덕후’와 그들의 아이돌 소비에 대한 이해는 우려할 만하다.
〈비밀병기 그녀〉가 말하는 덕후란, 음악에는 문외한에 가깝고, 진열된 아이돌을 적당히 골라 즐기며, 직캠이나 던져주면 그저 좋아하는 사람들이다. 아이돌은 일단 가수가 아니고, ‘고객’을 즐겁게 해줄 수 있는 이성적 매력을 경쟁적으로 어필하는 직업이다. 덕후는 잠시 즐기면 그만일 뿐, 따라서 아이돌에 대한 정성도, 존중도 필요가 없다. 이런 관계가 어디선가 많이 보던 것이라 생각한다면 나와 동의하는 지점이 있을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아이돌과 아이돌 팬이 진지한 존재로 인정받는 경우는 흔치 않은 것이 사실이다. 또한 젊은 여성이 ‘젊은 여자’ 이외에 조금이라도 다른 것으로 취급되는 일도 워낙 드물다. 그러나 이 방송이 보여주는 스탠스는 아이돌과 아이돌 팬들이 오랜 기간 극복하고자 노력해온 인식의 한 면을 다만 더욱 저열하게 바꾸어 전시하고 있을 뿐이다. 제작진 중에 정말로 아이돌 덕후가 있긴 한지 의문스러운 이 방송은 ‘덕후몰이’보다는 차라리 ‘덕후팔이’라 부르는 편이 나아 보인다. 그것도, 아주 나쁜 형태의 ‘팔이’ 말이다.
겨우 한 화 방송됐을 뿐이지만 〈비밀병기 그녀〉는 올해 최악의 방송의 반열에 오르기에 충분해 보인다. 아이돌과 아이돌 팬, 여성을 단숨에 싸잡아 모욕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방송이 타깃으로 하고 있는 아이돌 팬들은 이렇게 폄하되어야 할 이유도, 자신이 사랑하는 아이돌들이 모욕받는 꼴을 눈 뜨고 봐줘야 할 이유도 없다. 출연진들 또한 각자 호불호도, 인기도, 인정도 다르겠지만 모두 매력적이고 훌륭한 사람들, 이런 취급을 감내해야 할 죄를 짓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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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replies on “어떤 ‘덕후몰이 버라이어티’”
기대한 것보다 많이 안타까웠어요~
보면서 마음이 불편했는데, 그 이유를 이제 알겠네요.
MC 세명 모두 가수 출신인데도 후배들을 위해서
모니터 상황을 체크 해주지 않은 것은 이해가 안되네요.
정말 제대로 프로그램의 문제를 확실하게 꼽으신거 같아요. 보면서 느낀 모든 불편한 점에 대한 지적이 다 담겨있네요 ㅎㅎ
사실 저는 촬영현장에서 직접 봤습니다. 1화 마지막에 음색테스트 촬영때 아이돌들이 연습한것보다 너무 못불러서 다시 녹화를 요청했습니다만 10시간정도 넘게 촬영하면서 길어져서인지 감독이 너네들이 노래잘하면 복면가왕가야지 여기서 이거하겠어? 라고 하더군요. 괜찮다 음색만본다 하면서 넘어가서 나온게 방영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