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부터 가요계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게 된 커버와 리메이크. 과거의 명곡에서 동시대 케이팝까지 다양한 커버가 있었다. 그중에서도 특출난 결과물로 드러난 10곡을 골라보았다. 선정은 스큅, 심댱의 참여와 함께 랜디가 진행했다.
백예린 – 1. La La La Love Song (Kubota Toshinobu)
국내에는 2000년대 보아의 커버로 알려졌을, 일본의 90년대를 대표하는 가요곡. 일본에서 7~80년대 유행하던 시티팝풍의 훵크 베이스라인으로 칠링하게 편곡해, 2010년대의 창법으로 불렀다. 시대를 가로지르는 요소들을 깔끔하게 봉합한 수작. 함께 작업하는 구름과의 케미가 탄탄하다. 사장님 손이 닿지 않는 곳에서 더 빛나는 디바. 새 앨범으로 좋은 활동 보여주기를 기대한다.
유아(오마이걸) – 코뿔소 (한영애)
〈복면가왕〉 같은 음악 경연 프로그램은 경연 가수의 선곡을 눈여겨보게 된다. 그의 취향(혹은 심미안)을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88년 발매된 ‘소리의 마녀’ 한영애의 곡을 고른 대범함부터 원곡보다 훵키한 편곡, 스크래치로 블루스 느낌을 더한 해석 등에 박수가 나올 수밖에 없었다. 〈복면가왕〉의 게스트 패널로 자주 출연했던 그라서 더 신선한 충격이었다. 얼굴을 공개했을 때 터져 나온 유영석의 “우리가 알고 있는 그 유아야?” 외마디가 모두의 마음이었을 것.
케이(러블리즈) – 사랑의 미로 (최진희)
깨끗한 톤에 어울리는 정확한 음정과 적재적소에만 등장하는 기교가 바흐의 ‘G선상의 아리아’를 차용한 간주와 억지스럽지 않게 어울린다. 집중력이 대단히 높은 무대였다. 어찌나 완벽하게 소화했는지, 마지막 마디에 긴장이 흔들려 짧게 끊은 숨에 비로소 ‘아, 인간이셨군요’ 하고 느껴질 지경. 케이는 가요의 맛 중에도 특히 고전미를 우아하게 잘 살리는 보컬이다.
정국(방탄소년단) – 이런 엔딩 (아이유)
원곡이 포크의 성격을 띈 발라드인 바, 정국의 이 커버에서는 R&B를 네이티브 언어로 삼는 보컬이 다른 장르를 탐구하는 과정을 목격할 수 있다. 숨을 조였다 푸는 컨트롤에 더 많은 공을 들여 신경질적일 정도로 예민하게 불러냈다. 여기에 강세마다 음을 길게 끌어올리는, 한국 가요적인 벤딩을 추가했다. R&B를 부를 땐 볼 수 없었던 모습이다.
드림캐쳐 – 뱅뱅뱅 (빅뱅)
2016년을 강타한 인기곡이지만 여성혐오적 함의를 넣어야만 파티튠이 될 수 있다는 듯한 태도의 가사는 늘 지적 받았다. (요즘처럼 멤버가 클럽 내 특수강간 혐의로 시끄러울 때는 특히 꺼림칙하다.) 히트곡이 갖는 위상 탓에 ‘별 뜻 아니니 그냥 부르라’는 암묵적 압박이 분명히 존재했을 텐데, ‘그럼 별 뜻 아니니 반전해본다’ 하듯 쿨하게 임한 점이 포인트다. 댄서 없이 팀의 본래 멤버들만으로도 박력 있는 군무를 완성했다. “여자들은 위로, 남자들은 get low!”
화사(마마무) – Havana (Camila Cabello)
잘 어울릴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까지 잘 어울릴 줄이야. 연습 없이 라이브 방송 중에 짧게 부른 것이 화제가 되어 예능 방송에서도 짧게 부르게 되었다. 마마무가 올해 활동한 ‘별이 빛나는 밤’과 리믹스한 라이브 버전도 있다. 뜨겁고 끈적한 반주가 제 옷처럼 잘 어울린다. 2018년은 대중에게 화사라는 가수가 깊이 각인되는 한 해였다. ‘Havana’ 커버 역시 ‘곱창 먹방’만큼이나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이다.
더보이즈 – The Boys (소녀시대) & 루팡 (카라)
이제껏 남성의 여돌 커버 무대는 많았지만, 우리 사회에는 ‘여성성을 연기하는 남성은 남성답지 못하다, 그러므로 우스운 것이다’ 라는 규범이 강력하게 작동하는 탓에 그저 코믹한 코스프레가 되어버리는 일이 많았다. 노래의 주인들을 생각하면 대단한 실례다. 더보이즈는 여성 팬들이 납득할 만한 진지한 트리뷰트 무대를 만들었다. 철벽 같은 3세대 남돌의 인기에 대항하는 3.5~4세대의 차별점은 이런 것이 될 것이라 전망한다.
민서 – 에너제틱 (워너원)
올해 드디어 정식 데뷔를 이룬 민서. 이전부터 유튜브에 자신만의 영상 브랜드 ‘잎새달’을 꾸준히 올리고 있었다. 솔직히, 〈슈퍼스타K〉에서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숏컷 민서의 매력은 회사가 프로듀싱해준 앨범보다는 이 커버곡들에 더 많이 묻어 있다. 건반 하나로 단출하게 연주하는 편곡에서는 작곡가인 펜타곤의 후이가 처음 의도했을 코드의 색채들을 더 분명하게 들을 수 있다.
승관(세븐틴) – 와이파이 (윤종신)
2018년을 닫는 12월 넷째 주에 터진 뜻밖의 대박 커버. 세상 오만 사물을 이별의 직유 삼아보는 윤종신의 작법이 승관의 유머러스함과 가창력을 만났다. 원곡은 후작업 단계에서 쭉 내질러 부른 보컬을 부분부분 지워 완성했건만, 승관은 이를 천연덕스럽게도 맨목으로 불러낸다. 소리가 단단하고 컨트롤이 좋은 보컬이라서 듣기에도 좋다. 발빠르게 라이브 영상을 올린 유튜브 채널 딩고 뮤직의 ‘물 들어올 때 노 젓는 감각’도 감상 포인트다.
보아 – Man in the Mirror (Michael Jackson)
‘Man in the Mirror’ 발매 30주년을 맞아 원작자 Siedah Garrett과 보아가 함께 불렀다. (정확히는 2017년이 30주년이었고, 이 커버는 2018년 1월에 공개되었다.) 두 사람이 마주앉아 주거니 받거니 부른 것에서 원곡과는 다른 편안한 매력이 느껴진다. 음역대를 그대로 유지해 날카로운 남성 테너에서 부드러운 여성 알토가 된 것도 이런 감상에 한몫을 한다. 원곡의 작곡가가 30주년 기념 활동으로 선택한 것이 케이팝 가수와의 콜라보라는 점이 ‘플랫폼으로서의 케이팝’이 어디까지 와 있나를 생각해보게 한다.
* 2019년 3월자로 마이클 잭슨 아동성폭력의 피해자의 증언을 담은 다큐멘터리 〈Leaving Neverland〉가 공개되었습니다. 글쓴이는 2019년 3월 이후의 마이클 잭슨 트리뷰트 시도를 비판하며, 피해자와 연대합니다.
권외
민니((여자)아이들) – idontwannabewithyouanymore (Billie Eilish)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신진 음색깡패 민니. 정인이나 매드소울차일드의 박진실 등을 떠올리게 하는 음색이면서, 베이스가 적어서 에어리(airy)한 느낌을 준다. 완곡을 꼭 들어보고 싶은 커버.
지오(전 엠블랙) – If You (빅뱅)
이제는 BJ로 활동 영역을 옮겼지만 여전히 좋은 노래를 부르는 가수. 자유도가 높은 직업을 택한 것은 다른 이해 관계의 개입 없이 이런 음악활동을 지속하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하는 짐작을 해본다.
웬디(레드벨벳) – 헤어지는 중입니다 (이은미)
어린 시절을 해외에서 보냈다면서도, 웬디는 한국어 팝발라드를 기가 막히게 부른다. 2018년 버전은 연습생 시절 부른 버전보다도 원숙해진, 섬세한 해석이 돋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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