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 지코 트위터
언제부턴가 아이돌 그룹 소속 래퍼에게 ‘언더그라운드 출신’이라는 표현이 붙기 시작했다. 주로 어떤 진정성의 징표로, 경력을 입증하는 방식으로, 혹은 KS 마크처럼 품질을 보증하는 수단으로도 사용된다. 트레이닝 비용이나 시간을 절약한다는 점에서도 회사 측에서는 큰 이득이다. 다만 랩을 하는 사람이 아이돌 활동에 대한 각오와 고민, 그리고 방향에 대한 계획을 얼마나 가졌는지가 관건일 수도 있다. 아직도 연습생 때 랩을 배우는 사람들은 많다. 활동하는 과정에서 직접 가사를 써가며 능력을 키우는 사람도 있고, 여전히 랩을 쓰지 않는 아이돌 래퍼도 있다.
예전에 랩은 노래를 못하는 사람의 몫이었다는 것이 기정사실이었다. 랩 자체만으로, 8마디만으로 완성도 있는 곡 속 하나의 구조를 만드는 것이 아니었다. 랩은 곡에 끼워 넣는 하나의 ‘요소’였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아이돌도 완성도 있는 랩을 위해 신경을 쓰기 시작했고 지금은 랩을 맡는 멤버가 직접 가사를 쓰는 것은 물론 곡도 쓰는 추세로 기울었다. 아무래도 ‘아티스트’라는 이름표에 대한 갈망이나 음악성이라는 것을 채워넣기 위한 방식일 수도 있겠다. 정체성에 대한 욕심을 가지고 있는 아이돌 그룹 속 래퍼들이 많아지면서, 아이돌 활동과 홍대에서의 활동을 동시에 가져가는 사람들도 늘어났다.
한 명씩 사례를 통해, 막연하기만 하던 ‘언더 출신 래퍼’에 대해 살펴보자. 우선 내가 아는 바로 언더그라운드 출신 래퍼가 속한 최초의 걸그룹은 브라운아이드걸스(이하 브아걸)이다. 물론 브아걸의 초기 콘셉트나 연령대를 고려하면 걸그룹에 넣을 수 있는가 싶지만, 지금의 활동이나 음악을 생각해보면 이 라인업에 들어가는 것이 어색하지 않을 것이다. 허니패밀리 등을 거쳐가며 언더그라운드에서 음악을 해온 미료는 브아걸을 통해 가요계에 데뷔했고, 실제로 미료 덕분에 지금까지 안정적이고 좋은 가사와 랩을 얻을 수 있었다. <쇼미더머니 1>에서의 무대나 솔로 결과물들은 조금 아쉽지만, 오랫동안 음악을 해왔고 현재진행형인만큼 언제든 좋은 작품을 발표할 것이라고 기대한다. 물론 그 사이에는 빅뱅의 지드래곤이나 TOP도 있다. 지드래곤은 “2001 대한민국”이라는 앨범에 자신의 솔로곡을 발표하며(!) 데뷔했고, TOP는 “Tempo”라는 이름으로 활동했다. 다만 두 분 다 연세가 있으신만큼(?) 자료를 찾기가 참 힘들어서(??) 아무튼…
이후 시간을 살짝 넘기면, 2011년 브랜뉴뮤직과 스타덤의 합작 레이블인 당시 브랜뉴스타덤에서는 “블락버스터”라는 이름으로 준비하고 있던 아이돌이 데뷔한다. 바로 블락비다. 초기 준비 멤버 중에는 지코, 박경 외에도 지금 위너의 송민호, 팬텀의 한해도 있었다. 이들 모두 언더그라운드에서 활동했다고 말하고는 한다. 사실 언더그라운드의 범주가 어디까지인지는 불분명하지만, 어쨌든 “정글 라디오”라는 카페, 두메인이라는 크루, 지금의 한국 힙합에서 입지전적인 벅와일즈 크루까지, 몇 명의 래퍼들이 자연스럽게 행보를 이어오며 자작곡, 믹스테이프 발표 및 공연까지 다양한 활동을 해왔다. 지코는 현재 팬텀의 한해와 함께 벅와일즈 크루 소속이다. 다시 돌아와서, 블락비의 경우 지코, 박경, 피오까지 홍대 공연에 서기도 하였으며 지코와 박경은 데뷔 이전부터 믹스테이프와 자작곡을 계속 발표하였다. 비투비의 이민혁 역시 이들과 함께 곡을 만들기도 했다. 이민혁은 지금도 비투비 곡에 작사, 작곡으로 참여하고 있다.
굉장히 가시적인, 그러니까 지금도 충분히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는 활동을 한 멤버로는 EXID의 LE와 B.A.P의 방용국도 있다. 인터넷이 발전하면서 온라인상의 흔적이라는 것이 과거보다 훨씬 선명하게 남기 마련이다. LE의 경우 한때 한국 힙합 씬에서 가장 큰 집단 중 하나였던 지기 펠라즈에서 “Elly”라는 이름으로 활동했다. 이후 피노다인의 앨범에 참여하거나 지기 펠라즈 멤버들과 곡을 만드는 등 활동을 하다 EXID의 멤버로 데뷔했다. 방용국의 경우 소울커넥션이라는 크루에서 “젭블랙맨(Jepp Blackman)”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했다. 검색해보면 바로 찾아서 들을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지금의 B.A.P가 굉장히 잘 되었기 때문에, 많이 세련되어진 지금과 비교해보는 것도 하나의 감상포인트일 것이다.
이처럼 그룹마다 직접 가사를 쓰고 곡도 쓰는 멤버들이 한 명씩 있는데, 비교적 최근 데뷔한 방탄소년단이나 탑독 역시 그렇다. 방탄소년단의 경우 많은 멤버들이 꾸준히 믹스테입을 올리고는 했는데, 그 중 슈가의 경우 데뷔 전 “그로스(Gloss)”라는 이름으로 대구에서 활동했다. 랩몬스터는 현재 대남협(대남조선힙합협동조합)의 멤버로 있으면서 홍대에서도 활동하고 있다. 대남협은 최근 첫 믹스테입 “제 1차 회동”을 발표하였는데, 여기에는 탑독의 키도 역시 참여하였다. 대남협과 함께 얼마 전에 합동 공연을 한 크루가 로열 클래스라는 크루다. 여기에는 M.I.B의 심스와 스피드의 태운이 멤버로 있다. 이처럼 크루의 일원으로도 소속되어 여러 무대를 동시에 가지는 아이돌 그룹 멤버의 경우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 이외에도 기획사 스타덤은 이블의 쥬시, 탑독의 야노 두 멤버의 믹스테입을 발표하는 등, 각 멤버들의 독립적인 활동을 도모하고 있다.
적어도 보도자료든 어딘가에든 ‘언더그라운드 출신’이라는 타이틀을 쓸 경우에는 자신이 증명할 수 있는 최소한의 무언가를 가지고 있을 때, 그 때 자신 있게 썼으면 좋겠다. 정말 아무도 모르는데 언더그라운드 출신이라는 이름을 아무렇게나 붙인다면, 내가 여기서 쭉 말했던 사람들은 허탈함을 느낄 수도 있다. 아무도 모르게 언더 활동을 한 것이 무슨 언더 활동인지 모르겠다. 가끔 보도자료를 읽다 보면 언더그라운드 출신, 언더에서 인정받은 실력파라는 말을 쉽게 쓰고는 하는데 아무리 찾아도 그 사람이 뭘 했는지 모를때 난감함을 넘어 화가 날 때도 있다.
‘언더그라운드 출신’이라는 표현 자체가 사실 우스꽝스럽게 느껴질 때도 있는 것은 또 하나의 문제다. ‘언더그라운드’라는 단어는 통상 홍대를 기반으로 벌어지는 인디펜던트 힙합 시장을 이야기하는데, 과거 이 단어가 정신과 상황이 어느 정도 일치하여 그렇게 통용되었다면 지금도 편하게 써도 되는지는 의문이다. 그러니 차라리 ‘홍대 힙합 씬’이라고 하자. 최근 아이돌 그룹에 소속된 래퍼들은 자신의 음악성이나 자격을 인정받기 위해 홍대로 뛰어들고 있다. 정체성 구축의 한 과정인 셈이다. 더 이상 홍대 힙합 씬은 아이돌이 되기 위한 중간 과정이 아니며, 그렇게 접근하는 사람이 아직 있는지도 의문이다. 오히려 그 반대의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이 공간이 건강하고 병들고를 떠나 그 자체로 하나의 현상인 것이다.
지금은 양쪽 간의 성역화된 시선이나 장벽이 그러한 활동을 막고 있는 상황도 아니다. 경계지대에 서있는 사람의 수는 점점 늘어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이 홍대 힙합 씬의 아이돌 시장화 현상을 부추기는 등의 단점을 가져오기도 하지만, 사실 아이돌 시장화 현상에는 플레이어만이 아니라 환경이나 시스템 역시 동조하고 있다. 이렇게 복잡한 형세 속 어느 한쪽의 곱지 않은 시선을 감당해가며 고군분투하는 욕심 많은 이들에게 응원과 비판 중 하나만 택하라고 한다면 차라리 응원을 하겠다. 어떤 행보를 가지느냐가 물론 중요하기는 하지만 경계지대에 있는 이들은 그 나름의 고충이 있지 않을까. 무엇보다 아이돌 래퍼 한 사람을 평가할 때 다른 잣대를 부여하기보다는 그 사람의 음악이나 랩, 실력 자체로 평가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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