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돌로지 필진 단평. 김동한, 그로우비, 박봄, 골든차일드, 마이달링, 투모로우바이투게더, 전지윤, 남우현, 오마이걸, 백예린, 시우민, 헨리, 태일의 음반을 다룬다.
로지: 데뷔 미니앨범부터 시작한 시간 3부작의 마지막으로, 김동한이 작사에 전부 참여했으며 퍼포먼스도 상당 부분을 직접 구성했다고 한다. 앨범 참여도가 높은 만큼 곡을 이해하고 무대에서 표현하는 능력이 남달라 보인다. 능숙한 안무의 강약 조절과 여유 있는 무대 매너로 곡을 이끌며, 솔로임에도 무대를 꽉 채운다. 이전의 두 장에서는 섹시함에 초점이 맞춰졌다면 이번에는 청량과 파워를 가미했는데 그것이 김동한과 참 잘 어울린다. 타이틀곡 ‘Focus’는 신스 사운드가 트렌디하고 신비로운 느낌을 주면서 비트를 통해 김동한 본연의 에너지를 발산하는 걸 뒷받침한다. 수록곡 중에서는 노래할 때와 달리 저음으로 나른하게 내뱉는 래핑과 섹시한 매력이 두드러지는 ‘Bebe’를 추천한다.
마노: 지금까지 솔로 명의로 두 장의 미니앨범을 선보여왔으나, 솔직히 말해 ‘김동한’이라는 아티스트의 존재감은 어딘가 불안하고 흐릿하게 느껴지기만 했다. 스스로에 대한 확신이 다소 부족해 보였다고 하면 오만일까. 그러나 그는 본작을 통해 ‘김동한’이 누구인지, 진정한 ‘김동한다움’이 무엇인지를 정의하고 자신 있게 선언하는 것에 드디어 성공한다. 이전까지는 약점 가리기에 급급하다 못해 미처 숨기지 못한 약점을 고스란히 노출하고 마는 일이 잦았으나, 눈에 띄게 진보한 수행력과 확신에 찬 몸짓으로 무대를 온전히 장악함은 물론(‘Focus’) 피처링 없이 랩을 그럴싸하게 소화해내고(‘Bebe’) 발라드 한 곡을 진득하게 리드해내기도 하며(‘매일매일’) 솔로로서의 존재 의의를 기어코 증명해내고 만다. 그런 확신과 자신감은 작사와 퍼포먼스에 본인의 손길이 직접 닿아있다는 사실과도 아마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아티스트 본인의 발전도 그렇지만, 그의 매력을 최대치로 끌어올리고 약점은 효과적으로 가려주는 잘 맞는 곡을 만났기에 가능한 결과이기도 했을 것. 느긋하고 능글맞은 ‘Bebe’, 짜릿하게 밀고 당기는 비트와 묵직하고 거친 신스가 돋보이는 ‘Focus’, 그런지한 뭄바톤 사운드를 내세운 ‘Idea’ 등 각 트랙의 면모 역시 탁월하고, 다섯 트랙을 꿰뚫는 자신만만한 에너지는 앨범을 하나로 묶어내는 유기성 그 자체다. 이제야 비로소 완전해진 김동한이, 바로 여기에 서 있다.
로지: 한국방송예술교육진흥원 평생교육원 재학생들이 모여서 결성된 그룹이라고 하는데 그냥 딱 대학생이 모여 만든 동아리 같은 느낌이다. 보컬은 아예 트레이닝 받지 않은 것 같고, 그렇다고 안무가 기가 막히게 좋다거나 춤을 정말 잘 추는 것도 아니다. 음원의 상태는 마치 집에서 핸드폰에 녹음을 하고 반주를 입힌 것 같은 느낌이라 당황스럽다. 허술한 배경과 어색한 연기의 뮤직비디오를 보고 있자니 내가 다 부끄러워진다. 현재 걸그룹, 아니 오디션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연습생들조차 어느 정도의 실력을 갖추고 있는지 파악하고 제대로 된 트레이닝을 하고 나서 앨범을 냈으면 좋겠다.
미묘: 전작을 통해 느꼈던 것들을 거의 그대로 느끼게 하는 리패키지. 용감한 형제는 부인할 수 없는 감각의 실력자지만 감성적인 곡에서는 항상 최선은 아니란 것이다. 경우에 따라 그 질척임이 강렬한 임팩트를 남기기도 하지만, 박봄의 목소리가 짙은 호소력으로 다가오기보다는 축축하게 미끄러지는 점이 아쉽다. 그래서 (레게와는 별로 상관없지만) ‘봄 (Reggae ver.)’이 프로듀서 특유의 끈적한 그루브를 조여주는 것이 훨씬 반갑게 느껴진다. 박봄의 제2막이자 프로듀서와의 호흡 조정 기간이라 생각하면 초조할 것은 없어 보인다.
랜디: 골든차일드의 첫 시즌송. 첫 시도이지만 울림 선배 인피니트의 영향인지 매해 발표해온 것 같은 익숙함이 있다. 봄기운에 설레는 청자들을 겨냥한 어쿠스틱 시즌송이야 워낙 흔하지만, 휘파람이나 바이올린 카운터멜로디, 꼬리에 꼬리를 무는 보컬 시퀀스 등 부드럽게 들릴 수 있는 재료로 날카롭고 예민한 사운드를 만들어낸 것이 매력적이다. 울림과 긴 시간 일해온 제이윤의 솜씨다.
미묘: 모모랜드가 차용한 어떤 것의 원형에 충실한 곡이다. “준비하시고 쏘세요”로 대표되는 유의 삽입구, 의성어와 감탄사의 넉넉한 사용이 이 곡의 지향점을 정확하게 드러내며 또한 상당히 효과적인 호흡을 선보인다. 행사 튠으로서의 성질을 매끈하게 갖추고 있는데, 아마도 제목과 훅을 통해서 의도했을 임팩트까지 달성하기에는 조금 역부족인 듯하다.
랜디: 컨트리 테마에 트랩을 접목해 빌보드를 휩쓸어버린 릴나스엑스(Lil Nas X)의 ‘Old Town Road’에서 볼 수 있듯, 요즘 글로벌 유스 트렌드는 무슨 튠이든 일단 트랩 위에 얹어보자는 편인 것 같다. 고양이 강아지가 짓까불듯 두 음절씩 묶어 비트 위에 얹어놓기만 한 랩이 즐겁게 한 곡을 채운다. 딕션이나 심각한 메시지 같은 건 중요치 않고, 애초에 염두에 두지도 않았다. 뮤직비디오에 등장하는 고양이 귀 합성처럼 ‘틱톡’시대에 딱 맞는 곡이다.
심댱: EP이자 소설이라 명명한 “The moment I loved”는 스토리가 눈에 그려질 정도로 그 색채와 깊이가 뚜렷하다. 하룻밤의 강렬함은 트랙리스트를 따라 점차 옅어지는 한편 그리움은 짙어진다. 뮤직비디오 속 드랙 아티스트의 몸짓은 곡의 몽환적인 분위기를 시각적으로 전달하며 그의 이야기를 감각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한다. 그의 입을 통하지 않아도, 활자로 마주하지 않아도 이해할 수 있는 이 느낌적인 느낌은 그가 구현하고자 했던 이야기가 확고하기 때문일 것이리라. 전지윤의 ‘듣는 소설’, 그다음 페이지가 내심 기대된다.
마노: 생동감 있게 피어나는 판타지적 서정성은 이제 오마이걸만의 시그니처로 완연히 자리 잡은 듯하다. ‘다섯 번째 계절’은 언뜻 ‘비밀정원’의 연장선상에 있다는 인상이 강한데, ‘비밀정원’에서 서정성을 한 번 피워낸 바 있는 작곡가 스티븐 리가 작업했다는 것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오마이걸이라는 팀의 미덕은 무엇보다 상기한 ‘판타지적 서정성’과 ‘성장’이라고 생각하는데, 본작에서도 서서히 피어나듯 느릿하지만 단단한 성장이 엿보인다는 점이 고무적이다. 서드가 일전에 ‘불꽃놀이’를 평하며 언급했다시피, “‘사랑’이라는 단어를 꺼내는 것조차 수줍어하던 소녀의 이미지는 더는 보이지 않으며, 앞으로도 되돌아갈 것 같지 않다”는 점이랄까. 특히 초창기에는 ‘사랑’이라는 단어가 수줍은 나머지 다른 말로 빙빙 둘러대곤 했다면 이제는 “사랑이면 단번에 바로 알 수가 있대”라며 심지 굳은 말투로 사랑을 논하고 있는데, ‘비밀정원’-‘불꽃놀이’로 쌓아온 성장 서사를 무너뜨리지 않고 유기적으로 이어가는 흐름으로 읽히기도 한다. 사운드나 서사뿐만 아니라, 생동감과 서정성을 함께 살린 완성도 높은 퍼포먼스 역시 팀의 고유한 시그니처로 자리 잡았음을 넷상에서의 활발한 바이럴로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수록곡의 면면은 대체로 준수하고 흐름도 나쁘지 않으나, ‘다섯 번째 계절’ 인스트루멘탈 트랙을 제외하고 마지막 트랙 격인 ‘Checkmate’가 더 이어질 법도 한데 갑작스럽게 끝난 것만 같은 인상을 주는 등 마무리감이 매우 아쉽다. 타이틀곡과 마찬가지로 스티븐 리가 특유의 서정성을 발휘한 ‘소나기’, ‘으른미’를 한껏 뽐내는 ‘Vogue’와 ‘Checkmate’는 놓치면 아쉬울 트랙.
미묘: 데뷔 초기 오마이걸은 꽤나 ‘좋은 취향’의 그룹으로 여겨졌고 이는 고전 팝을 연상케 하는 화성감과 내추럴한 질감의 편성과도 연관이 있다. ‘비밀정원’부터 부쩍 신스의 비중이 커진 비트를 사용하고 있어 제법 변화한 셈인데 그럼에도 어떤 일관성을 유지하는 비결이 이 앨범에 담겨 있다. 데뷔 초기부터 특히 수록곡에서 보여준 레트로가 과거 음악 스타일의 요소나 특정 사운드보다는 차라리 해학적인 어조나 표정을 가져오는 것에 가까웠고 이는 이번에도 ‘미제’나 ‘Checkmate’에서 여실히 느껴지는 바이다. ‘Vogue’는 같은 방식으로 다른 시대에 접근하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제법 널찍한 스펙트럼으로 구성된 앨범인데도 강한 일관성을 느낄 수 있는 것은 그만큼 음반이 표현하는 인물상이 매우 구체적이고 선명하며 그것이 팀의 색채로 완결성 있게 담기기 때문이다. 한 팀 혹은 한 장의 앨범이 담아낼 수 있는 음악적 스타일의 범주를 넓혀 나가는 흥미로운 방식. 이를 통해 팀이 성장하고 점점 입체감을 더해감은 물론이다.
심댱: 일본 아니메 풍의 벅차오름은 마치 ‘비밀정원’이 품은 잠재력을 발산하는 듯하다. 감정을 확신하는 순간 뻗어 나가는 멜로디는 사랑을 필연의 언어로써 긍정하게 한다. 비주얼 콘셉트는 유화의 질감과 함께 하늘거리는 튜튜와 토슈즈, 박물관 등 클래식한 소재를 활용해 섬세한 이미지에 힘을 실어준다. 강도는 조금씩 달라도 촉촉함을 유지하는 트랙리스트는 부드러우면서도 탄력 있고, 자기의 감정 앞에 강단 있는 소녀의 모습을 그린다. 필연의 거센 흐름에 몸을 맡기던 인물은 물방울처럼 통통 튀기도 하고(‘미제’, ‘Tic Toc’, ‘Crime Scene’) 눈 앞에 펼쳐진 은하수를 한껏 끌어안는다(‘유성’). 줄곧 물을 연상시키던 트랙은 후반부에 이르러서야 플래시처럼 번쩍인다. 깊은 물 속을 번쩍 비추는 섬광 한 자락 같은 ‘Vogue’와 ‘Checkmate’는 수분 함유량이 높은 ‘심해’ 바로 다음에 배치되어 약간은 얼떨떨하지만 기분 좋은 배신감을 준다. 이벤트성 기획으로 종종 등장했던 ‘오마이보이’나 콘서트에서의 과감한 선곡들로 미루어보건대 아티스트의 야심도 기획에 함께 녹여진 듯하다. 소녀의 내면을 다양하게 표현하는 그들이 어디까지 갈 수 있을지, 그들이 가진 팔레트로 그려지는 그림을 느긋한 마음으로 기다리게 된다.
미묘: 발라드 기조의 솔로 활동에 느닷없이 록을 끼얹었나, 하고 들여다보면 사실 록을 선택했다기보다는 록이 흐르던 어떤 상상된 과거를 선택한 것에 가까워 보인다. 타이틀 ‘Hold On Me’와 이어지는 ‘Rain’이 (‘넌 나만 바라봐’의 누구나 알 수 있는 명시적 과거의 반대편에서) 1990년대 초중반의 팝/록 향취를 풍긴다. 남우현의 보컬은 유약한 듯한 외형 속에 (가요식으로 응어리진) 에너지가 있는 편이라 이를 담는 가장 쉬운 방법은 발라드일 것이 분명하지만, 심각하게 으름장 놓는 듯한 록에 날렵한 움직임을 실어낸 것이 사뭇 신선하게 느껴진다. 후반부의 ‘Crying Baby’에서 퓨처베이스로 뻗거나 ‘넌 나만 바라봐’에서 윤상을 상기시킨 뒤 ‘Flower’로 가라앉는 것 모두 각각은 남우현의 보컬과도 잘 맞고 나름의 일리도 있지만, 사이사이에 한 곡씩 빠진 것 같은 허전함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는 앞선 곡들의 흐름이 차분하고 설득력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로지: 백예린은 곡 소화 능력이 정말 뛰어난 가수라고 생각한다. 장르를 불문하고 어떤 곡이든 잘 어울리고, 다른 가수의 노래를 부르더라도 마치 본인의 곡처럼 부르는 능력이 있다. 또한 솔로로 활동을 시작한 이후로는 음반의 작사, 작곡에 높은 비중으로 참여해왔는데, 이번 OST에서도 작사를 맡았다. 맑은 여름날 같은 백예린의 목소리는 학교와 친구, 우정을 소재로 한 웹 드라마에 잘 어울리고, 친구에게 직접 말하는 듯한 가사는 마음의 위로가 되는 따뜻함을 느끼게 해준다.
랜디: MBC ⟨나 혼자 산다⟩ 등의 방송에서 알려졌듯 헨리는 피아노, 기타 등의 악기를 수족처럼 다루는 멀티인스트루멘탈리스트다. ‘제목 없는 Love Song’은 섹션마다 악기의 특성을 최대한 살려 작곡되었다. 인트로와 프리코러스를 혼자 이끌어가는 재즈-발라드 피아노, 2절부터 겹쳐 얹히는 오르간, 브리지의 애절한 표정을 구현하는 기타 모두 악기의 성격을 자연스럽게 표현하는 고전적인 형태의 팝 발라드다. 6/8박자에 넋두리처럼 매치한 휘성(Realslow)의 가사도 즉흥곡 같은 분위기를 한껏 살려준다. 그는 2007년 슈퍼주니어의 객원 멤버로 케이팝 씬에 데뷔하기 전에도 이미 실력을 인정받는 음악가였다. 지금 이렇게 케이팝 유행과는 상관없는 노래를 내는 것이 편안해 보인다.
로지: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시작하는 사랑 고백 노래이다. 가장 인상 깊은 것은 가사인데, “너의 눈 너의 코 네 입술까지 다 노래로 만들고 싶었어”, “수많은 음표 속에 진심이 담겨있어”, “네가 나를 보면 웃으면 Sweet한 멜로디가 떠올라” 등 사랑을 고백하려는 상황에서 상대방을 상상하며 드는 기분이나, 어떤 말로 고백을 해야 할지 고민하는 모습을 묘사하여 가사로 풀어냈다. 거기에 헨리의 장난스러운 듯 귀여운 음색이 잘 어울리고, 진심을 다해 음표 하나 가사 하나 꾹꾹 눌러 쓰고 고백하려는 상황이 그려져 사랑스러움이 넘쳐흐른다.
로지: 입대 전 따뜻한 발라드 곡을 팬들에게 선물하고 갔다. 입대 날짜인 5월 7일에 맞춰 곡의 길이가 5분 7초인데, 사소하면서도 섬세한 기획이 돋보인다. 시우민의 목소리는 얇고 독특한 편인데 가성으로 노래를 할 때 그것이 특히 돋보인다. 음악의 장르나 분위기에 따라 톤을 자유롭게 조절하는데 랩을 하면 강렬하게 내뱉으면서 댄스곡과 잘 어울리는 목소리가 되고, 노래할 때의 부드러운 미성은 발라드에 잘 어울린다. 엑소에서 서브 보컬과 서브 래퍼를 맡고 있지만 멤버 수가 많다 보니 파트가 그렇게 많지 않고, 유닛 첸백시에서는 주로 랩을 하기 때문에 그동안 볼 기회가 많지 않았던 ‘노래하는 시우민’의 음색과 가창력을 충분히 느낄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랜디: 심플한 발라드곡이지만 태일의 보컬로 특별해졌다. 그의 보컬은 테크닉 면에서 강약을 정확하고 섬세하게 조절할 줄 알고, 감정은 지나치지 않을 만큼 절제해 담는다. 블락비라는 그룹의 이미지에선 다 보여주기 어려웠던 능력을 솔로 작품으로 계속해서 보여주고 있다. 2019년 현재, 이런 노래를 전면에 내세우는 발라드 가수는 줄었지만 아이돌 그룹에 소속된 보컬리스트들이 해당 장르의 명맥을 잇고 있는 점이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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