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유 – ‘너랑 나’ & 마츠다 세이코 – ‘시간 나라의 앨리스’
케이팝의 최대 부흥기라는 요즘의 한국, 그리고 아이돌이 가요계의 주역이던 쇼와 시대 일본. 두 나라의 닮은 듯 다른 가수와 노래들을 나란히 놓고 살펴보며, 케이팝 얘기도 해보고, 쇼와돌 가요 소개도 해보는 연재입니다. 가벼운 읽을거리로 즐겨주세요.
현재 케이팝 시장의 대표적인 솔로 아이돌 아이유. 아이유가 본격적으로 일본 데뷔를 했을 때에, 많은 팬들이 아이유와 쇼와 아이돌, 그중에도 특히 마츠다 세이코(松田聖子)의 유사성을 언급하더라고요. 작고 마른 체구, 귀엽지만 어딘지 아련해 보이는 표정과 스타일링, 또래 가수 중에도 튀는 표현력 및 성량과 가사 속에 그려내는 독특한 세계관까지. 이 글에선 그 파편으로만 떠돌던 이야기들을 두 가수의 노래 한 곡씩과 버무려보려 합니다. 오늘 소개할 노래 두 곡은 아이유의 ‘너랑 나’, 그리고 마츠다 세이코의 ‘時間の国のアリス(시간 나라의 앨리스)’입니다.
닮은 점: 앨리스가 주제?
‘너랑 나’의 시각 콘셉트 중 가장 대표적인 요소를 꼽자면 어떤 걸 꼽으실래요? 전 ‘앨리스 룩’이라 불린 그 미니 원피스가 가장 먼저 떠오르네요. 끝이 둥근 피터팬 칼라와 같은 색의 커프스, 그리고 그것들을 돋보이게 만드는 배색과 질감의 원피스를 주로 입었죠. 그래서 시간이 지나고 기억이 흐려진 시점에 ‘너랑 나’를 떠올려보니, 저도 모르게 무심코 ‘동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이하 앨리스) 콘셉트였다’라고 기억하고 있더라고요.
하지만 실제 가사를 읽어보면 앨리스에 대한 레퍼런스가 그렇게 많지 않았다는 걸 알게 됩니다. 노래와 뮤직비디오가 일관되게 담고 있는 서사는 ‘영특하고 조금 남다른 소녀가 어른 남자와 사랑에 빠져, 미래로 가서 어른이 되어 그와 맺어지고 싶어한다’이죠. 한발 양보해서 아주 거시적으로 보자면 앨리스 원작에 흐르는 로리콤적 시선과 맞닿은 데가 있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차라리 다음 앨범 “Modern Times”의 동일 제목 수록곡에 “시계 토끼처럼 늘 급한 얼굴로 나를 지나쳐가요”라는 가사가 등장하는 것에 비하면 아주 미미한 레퍼런스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보다는 어린 소녀가 어른 남자를 사랑하는 마음을 판타지적인 색채로 표현하기 위해 쓰인 듯한 레퍼런스들이 훨씬 많이 보여요. 뮤직비디오에 등장하는 직육면체 부스형 타임머신은 시공간 여행을 다루는 드라마 〈닥터 후 (Doctor Who)〉의 타디스(TARDIS)를 연상시키고, 무대 뒤를 가득 채운 톱니바퀴들은 SF계의 빈티지풍쯤 되는 장르 스팀펑크 느낌을 물씬 냅니다. 그러고 보니 아이유가 입은 하얀 칼라의 미니드레스는 웨스 앤더슨의 영화 〈문라이즈 킹덤 (Moonrise Kingdom)〉에서 어른들의 눈을 피해 사랑의 도피를 감행한 미성년자 수지(Suzy)의 의상처럼 느껴지기도 하네요.
마츠다 세이코(이하 세이코)의 ‘時間の国のアリス (시간 나라의 앨리스)’도 그래요. 제목에선 앨리스를 표방하고 있긴 한데, 가사를 보면 앨리스만 얘기하고 있지 않아요. 달에 걸터앉아 손피리를 불고 하늘을 나는 소년, 호박 마차, 독이 든 사과… 어릴 적에 세계 명작 동화 좀 읽어본 분들이라면 아실 만한 다양한 동화 레퍼런스가 쉴 새 없이 등장합니다. 제목에 앨리스가 등장한다는 것을 빼면 실제로 앨리스에서 따온 것은 현란한 동화적 세계와 어린 소녀의 이미지 정도밖에는 없어요.
‘시간 나라의 앨리스’의 가사를 살펴보면, 작사가인 마츠모토 타카시(松本隆)가 진짜 주제로 삼은 동화는 바로 〈피터팬〉이에요. “반팔 스웨터를 입은 그대가 초승달에 걸터앉아 손 피리를 불고있어” 같은 가사를 보면 분명해 보입니다. 이 노래를 부르던 시점에 세이코는 이미 성인이었지만, “마법의 시계를 거꾸로 돌리면” 같은 가사나 피터팬 레퍼런스에서 ‘영원히 소녀이고 싶은 동화 속의 아이돌’의 이미지를 견고히 하려는 듯합니다. 그러고 보면 아이유의 ‘너랑 나’와 세이코의 이 곡 모두, 앨리스가 떠오르긴 하지만 사실은 ‘시간을 뛰어넘는 것’이 가장 중심 되는 주제라고 볼 수 있겠네요.
다른 점: 어른이 되고 싶은 소녀, 소녀로 남고 싶은 어른
아이유의 곡에서는 어른인 그 사람을 사랑해서 시간 여행까지 불사하는 소녀가 등장합니다. 당시 아이유 팬덤의 다수를 이루던 든든한 삼촌팬들에게 보내는 선물이라고 볼 수도 있겠죠. 또, 이 곡의 히트는 이전과 이후에 발매했던 ‘잔혹동화’나 ‘분홍신’에서도 볼 수 있는 동화적인 별세계를 아이유 콘셉트의 큰 축으로 자리매김하는 역할을 했어요. 이 앨범 활동 후 일명 ‘트위터 스캔들’이 터지긴 했지만, 그다음 앨범인 “Modern Times”에서도 타이틀곡인 ‘분홍신’을 비롯해 여러 곡에서 동화적인 정서가 등장하며 아이유라는 기획에 일관성을 유지했습니다. 어른이 되고 싶었던 소녀가 진짜 어른이 되어버리기는 했지만, 환상적인 동화 속 세계로 듣는 이들을 초대하는 점은 같아요.
마츠다 세이코의 17번째 ‘시간 나라의 앨리스’는 발매 시점상 세이코의 커리어에 꽤 중요한 역할을 한 곡입니다. 초기 싱글들의 특징을 살펴보면, 평범한 소년과 사랑에 빠진 앙큼한 소녀가 화자로 나오는 곡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푸른 산호초 (青い珊瑚礁)’, ‘붉은 스위트피 (赤いスイートピー)’ 등 제목과 가사에서 선명한 색감과 계절감을 제시해 일상에 로맨틱함을 덧칠한 작업들이 사랑을 받았죠. 그러다 얼굴 없는 가수로 영화와 광고에 취입한 14번째 싱글의 커플링곡 ‘SWEET MEMORIES’가 대히트를 치며 ‘춤추며 귀여움 떠는 아이돌일 뿐만이 아니라 어덜트 컨템포러리 발라드도 훌륭하게 소화해내는 아티스트’의 이미지를 구축해냅니다. 이를 의식한 듯 15번째 싱글도 발라드곡을 발표했고요.
한편, 84년은 그 전전 해에 대거 데뷔한 ‘꽃의 82년조’ 아이돌들(나카모리 아키나, 코이즈미 쿄코 등)이 큰 인기를 얻기 시작한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여자 아이돌 부동의 인기 1위였던 세이코의 입지가 흔들리리라는 우려가 나오는 것이 당연한 수순이었을 거예요. 세이코가 아티스트로 노선 변경을 하느냐, 아이돌 포지션을 유지하느냐가 많은 사람들의 관심사였던 그 해, 세이코는 뉴질랜드에 다녀온다더니 은근슬쩍 쌍수를 하고(…) 84년 첫 싱글로 아바(ABBA)를 연상시키는 밝은 댄스곡 ‘Rock ’n’ Rouge’를 들고 나타납니다. 그리고 영화 개봉 등 숨 가쁘게 활동하며 3개월 후 연이어 발표한 곡이 바로 ‘시간 나라의 앨리스’입니다. ‘내가 잠시 아티스트 노선으로 외도한 동안 재미들 좀 봤어?ㅋ 아이돌 퀸 세이코가 돌아왔다!’라고 쐐기 박기 하는 듯한 핑크핑크 동화동화한 노래 말이에요.
‘시간 나라의 앨리스’는 어찌 보면 이전까지 세이코가 발표했던 곡들과 사뭇 다른 점이 있어요. 그전까지 세이코의 가사에 등장했던 남자아이는 대부분 무뚝뚝하거나 (“서로 알고 지낸 지 반년이 넘어도 그대는 손도 잡아주질 않아” ‘붉은 스위트피’ 중), 서툴거나 (“진지한 얼굴로 ‘키스해도 돼?’ 라니 무드를 모르는 사람” ‘비밀의 화원 (秘密の花園)’ 중), 여자아이의 밀당에 속내를 간파당해버리는 (“‘한 다스나 되는 걸프렌드들’ 하지만 막상 얘기들만큼 인기는 없어” ‘Rock ’n’ Rouge’ 중) 어리숙하지만 현실에 있을 법한 남학생상이었는데요. ‘시간 나라의 앨리스’는 아예 남자아이가 동화 속의 사람입니다. 오히려 여자아이 쪽이 “그대를 좇아 하늘을 날아보지만 잘 날 수가 없는” 보통 사람이죠. 노래를 듣는 팬들을 단순한 유사 연애의 세계에서 아예 다른 세상으로 데려가 버리는 거예요. 세이코가 앞으로도 제시하려는 영원한 아이돌의 세계는 팬들이 주인공이 아니면 성립되지 않는 듯이요. 그 세계에 사는 세이코 역시 ‘어른이 아닌 소녀’의 모습을 간직한다는, 일종의 선언이 아니었을까요. 같은 시기 본격적으로 인기몰이를 하며 세이코의 가장 강한 적수로 떠오른 나카모리 아키나의 노래들이 ‘어른과 위험한 사랑을 하며 어른처럼 보이고 싶어하는 소녀’인 것을 감안하면 완벽한 안티테제 선언이었을지도요.
다른 점: 펀치라인으로 비교해보시죠
두 곡에서 가사 세계관을 가장 잘 집약하고 있는 결정적 한 줄을 꼽는다면, 전 이 라인들을 꼽고 싶어요.
눈 깜박하면 어른이 될 거예요
날 알아보겠죠
그댄 기억하겠죠 그래 기묘했던 아이
아이유 – ‘너랑 나’
어른이 된 소녀가 사랑하는 남자 앞에 마주 섰을 때 남자가 소녀 시절 그녀의 남달랐음을 떠올린다는 점이, 소녀를 아이유로 자연스럽게 치환해 상상하게 하면서 아이유를 다른 콘셉트의 아이돌과 차별화하는 역할도 하지 않았을까요? 어른과 사랑에 빠지는 조금 신비하고 조숙한, 그렇지만 어디까지나 소녀는 소녀인 캐릭터.
“누구든 어른이 되고 싶지 않은 거야”
영원한 소년인 그대가 말해요
마츠다 세이코 – ‘시간 나라의 앨리스’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요. :)
닮은 점: 꿈 같은 세계지만 갑자기 훅 들어오는 적극적 초대
두 곡은 남녀 사이의 애틋한 마음을 동화 같은 신비한 세계를 배경으로 그려냅니다. 상상력이 이런 비일상에까지 닿지 않는 청자들에겐 공감이 덜 될 수도 있어요. 그래서인 듯, 화자는 사랑에 안타까워하는 제 감정과 동화 같은 세계를 한참 얘기하다, 듣는 이에게 불쑥 말을 겁니다. ‘너랑 나’에서는 “나랑 놀아주는 그대가 좋아 내가 물어보면 그대도 좋아” 하고 노래하다, “내 이름이 뭐야?” 하고 묻습니다. 소녀의 재롱을 흐뭇하게 지켜보다가 급히 주의가 환기되는 지점이죠. 처음부터 노래 전체에 걸쳐서 “내 이름을 불러줘”라며 김춘수의 〈꽃〉마냥 이름을 부르는 것을 강조하던 화자가 마치 ‘이 사람이 내 말을 잘 듣고 있나, 미래에 내가 너를 못 알아보고 헤맬지도 모르는데 그때 꼭 불러줘야 하는 이 내 이름을 잘 알고 있나’ 하는 것처럼요.
‘시간나라의 앨리스’의 앨리스 역시 노래의 가장 말미에 갑작스런 요청을 합니다. 그전까지는 동화 속의 소품들을 나열하고, 널 따라 잘 날 수가 없어서 뾰로통해지는 나를 그리고, 그 내가 ‘시간 나라의 앨리스’라는 것을 반복적으로 말하다가, 맨 마지막에 “꿈이라면 이 다음을 보여줘” 하고 미션을 줍니다. 밀당을 하긴 하지만 결국은 남자아이에게 리드해달라고 하는 소녀상은 그동안의 세이코 가사관에서 일관되게 보여지던 모습이지만, ‘시간나라의 앨리스’는 꽤 무거운 책임을 지우네요. ‘이 다음을 보여’주려면 끊임없는 사랑으로 이 아이돌의 세계가 계속돼야 할 테니까요. 50대의 나이에도 마츠다 세이코가 지금까지 ‘영원한 아이돌’로 사랑받는 걸 보면, 세이코의 팬들은 그 책임을 꽤 잘 수행한 것 같습니다.
마치며
사랑받는 아이돌에 정형이 있지는 않겠지만, 서로 다른 시대를 풍미한 두 가수를 나란히 놓고 보니 귀엽고 노래 잘하는 아이돌에 애틋한 감성의 내러티브를 부여하는 작업이란 꽤나 복잡하면서도 인기에 필수적인 일이란 생각이 듭니다. 덕후의 마음을 울리는 아이돌은 참으로 여러 사람의 재능과 노력을 필요로 하네요. 그것을 가볍게 일상의 BGM 삼으면서, 또는 이렇게 저렇게 가만히 곱씹어보면서 여러 가지 방법으로 즐겨주는 것이 그 콘텐츠를 기획하고 생산한 사람들이 마음으로 팬들에게 바라는 바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물론, 입금도 중요하겠지만요. ^^;
(+ 참고로 2015년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나온지 150주년 되는 해라고 합니다. 왠지 이 글을 앨리스에게도 헌정해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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