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돌로지 필진 단평. 태민, 일급비밀, 있지, 세븐센시즈, 세러데이, 드림캐쳐, 인피니트, 하이큐티, 화사, 닉쿤, 라비, 몬스타엑스, 트레이, 이달의 소녀, 워너비, 윤지성, 김보형, 효민, SF9을 다룬다.
미묘: 케이팝이 결국 인물에 관한 것이라면, 이런 인물을 낳기 위해 산업 전체가 움직여온 것 같은 기분이 드는 대목이다. 다만, 그것이 케이팝의 대표 이미지인 선량과 건전의 정확히 반대편 끝이다. 마치 케이팝에 어두운 뒷면이 있다면 이런 탐미적인 세계여야 한다는 듯한 곡들이다. 이를 단신으로 책임질 사람이 있다면 태민일 것임은 분명하다. 음험한 관능을 빽빽하게 늘어놓는 전반부도 압도적이지만, 심지어 상당수의 곡들이 기승전결을 마치지 않고 절정에서 그대로 내려놓듯 마무리되고 있어 미니앨범 전체와 각 트랙이 저마다 흔들림 없이 무한반복될 것만 같은 아득함을 제공한다. 더 큰 긴장을 부여함과 동시에 곡마다의 ‘이야기’보다는 각곡의 ‘표정’을 만나게 하기도 한다. 평소보다 섬세한 표현력의 보컬을 선보이는 ‘혼잣말’, 다른 곡보다 덜 위압적일 것만 같음에도 팽팽하고 아슬아슬하게 들리는 ‘Never Forever’를 놓치지 말길 권한다.
스큅: ‘Move’가 관능에 충실하며 원초적인 ‘쾌’를 자극하는 놀음이었다면, ‘Want’는 보다 치밀하고 계산적인 수싸움을 보는 듯하다. 따라서 차곡차곡 쌓아 올린 텐션이 브리지에서 폭발하는 순간의 짜릿함은 ‘쾌’의 감각이라기보다 각성의 희열이라 일컬어야 할 것이다. 지각(perception)과 인지(cognition)의 차이, 말초신경계와 중추신경계의 차이랄까. 역치를 찍었다 생각했던 순간을 지나서도 보여주지 못했던 지점을 찾아 꾸준한 성장곡선을 도모하는 모습에 경이로움을 넘어 경외심마저 품게 된다. 점진적인 하강구도를 보이다 아우트로로 반등의 힌트를 제공하는 트랙 배치에서는 이 역시 결국은 다음 앨범을 위한 초석에 불과하다는 메시지가 읽혀 앞으로도 성장이 계속되리라는 확신을 가지게 된다. 이대로 충분하지만서도 다음을 더 기약하게 만드는 앨범. 전반적으로 공연용 트랙을 의도했다는 인상이 강한데, 특히나 ‘Shadow’와 ‘Truth’는 무대를 꼭 확인하고픈 마음이 있다.
미묘: 스윗튠이 작정하고 80년대 풍을 늘어놓는다. 그것이 가요로서 잘 성립하고 있어, 80년대 취향으로 현재의 케이팝을 만든다는 것만큼은 성공적이다. (보이그룹의 청량미라는 기호 자체가 지금 살짝 뒤처졌다고 할 순 있겠다.) 다만 어딘지 기운이 조금 빠져 있는데, 많은 이들이 ‘스윗튠의 피크’로 기억하는 시기에 비해 치열한 느낌이 덜한 것은 사실이고 그 공백을 음악적으로 설득력 있게 가꿔내는 것이 남은 숙제라고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런 아쉬움을 상대적으로 크게 덜 느낀 선례도 있기에, 이것은 혹시 팀에게 맞지 않는 옷은 아닐까 하는 (불경한) 생각도 해보게 된다.
미묘: 이 ‘틴 크러시’가 성인의 시선에서 비롯됐음을 숨기지 않는 대목은 많다. 보기에 따라서는 X세대의 송가라 해도 크게 과언은 아니다. 그러나 베이스뮤직의 영향권에 하우스 비트를 조합하여 긴장감 넘치는 카리스마와 통쾌한 속도감의 훅을 겸비한다는 레시피는, 단순한 듯 과감하며 영민한 한 수다. 무엇보다도 멤버들의 선명하고도 강렬한 매력은 모든 것을 넘어서는 직관적인 매혹이다. JYP의 비법 소스는 여전하고 또한 유효하다.
스큅: 트와이스를 대표하는 수식어 ‘예쁜 애 옆에 또 예쁜 애’의 핵심은 ‘예쁜 애’가 아니라 ‘또’다. 즉, 엇비슷한 매력을 가진 ‘예쁜 애들’의 집합체가 아닌 새로운 매력의 ‘예쁜 애’가 계속해서 ‘또’ 등장하는 개체들의 연쇄를 포착하는 수사다. 있지는 그러한 트와이스의 강점을 소규모 인원에 맞추어 변용한다. 줄어든 멤버 수만큼 개개인에게 스포트라이트를 더 비추며 연쇄성보다는 개체성에 주안점을 둔다. “달라 달라”라는 단 한 마디에 멤버들의 각기 다른 개성은 물론 ‘한끗’ 다른 팀의 방향성까지 압축적으로 담겨있는 셈이다. 트와이스와의 차이를 넘어서 다인조 그룹이 성행하던 와중 5인조 그룹을 내놓았다는 점, 굳이 외국인 멤버를 내세우지 않은 점, 별도의 해외 타기팅과 마케팅 없이도 해외에서의 폭발적인 반응을 이끌어낸 점 등 ‘3세대 아이돌’로 불리던 이들과도 다른 조류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 선명하게 느껴져 진정한 ‘4세대 아이돌’의 출범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2019년도 케이팝 씬의 주요한 표지 중 하나로 자리할 데뷔 싱글.
조은재: ‘여돌 명가’ JYP에서 핫샷 데뷔한 새 걸그룹. 아이돌 그룹의 멤버 캐스팅은 한동안 10인 내외의 다인원 그룹의 형태가 유행하다가 최근 다시금 7인조 이하로 축소되고 있는 추세인데, 이 5인조 걸그룹은 단순히 트렌드를 반영해서 나온 ‘결과물’이라기 보다는 레이블의 약 20여년의 노하우가 만든 어떤 ‘결론’에 가까워 보인다. 빠지는 부분 없이 구성된 정예 멤버들처럼 데뷔곡 ‘달라달라’ 또한 흘려 들을 부분 없이 있지를 대중에게 효과적으로 소개한다. 힘차게 외치는 구호 “I love myself”부터 패기 있는 “철들 생각 없어요/바꿀 생각 없어요”, 해맑은 자신감으로 가득 찬 “난 특별하니까 Yeah”까지, 있지의 캐릭터 또한 간결하면서도 명료하게 제시한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이 팀에서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은 근래 보기 드물 정도로 높은 수준으로 구성된 퍼포먼스다. 빠른 비트에도 불구하고 여유롭게 박자를 타며 무대에 오를 때마다 가벼운 애드리브 제스처까지 추가하는 모습은 아무리 봐도 ‘아이돌 2회차’다. ‘빡센 춤’을 추는 걸그룹을 대중이 반기지 않는다는 통념을 정면으로 부순, 케이팝 걸그룹 데뷔 중 가장 통쾌한 순간. JYP가 역시 명가는 명가다.
미묘: SNH48의 서브유닛인 세븐센시즈의 한국어판 발매곡. 신사동호랭이가 담당한 트랙은 플럭 사운드로 어지럽게 흩날리는 공간에 느긋하지만 묵직한 비트와 빈티지 아날로그 신스 브라스와 워블 등을 더했다. 그렇다, 케이팝으로서 썩 익숙지 않은 조합이고 걸그룹의 곡으로선 더 그렇다. 상당한 공격성의 퓨처베이스로 빠지는 후렴도 마찬가지다. 시대감이 다소 애매하게 느껴질 순 있겠으나 신선한 자극이 될 만한 접근이다. 다만 보컬이 음절마다 너무 똑똑 끊어지는데 그것이 온통 정박이라서 고혹적인 긴장을 느끼기는 어렵다. 중국어 버전을 들으면 확실히 더 설득력 있다.
스큅: ‘모모랜드가 아니라고?’ 소리가 절로 나올 정도로 흡사하다. 굳이 차이점을 꼽자면 보컬이 전체적으로 하이톤이라 모모랜드의 묵직한 ‘스웨거’에 비해 경량급이라는 점. 작년 ‘뿜뿜’과 ‘Baam’의 연이은 선전 이후 모모랜드의 공식을 카피한 아이돌이 우후죽순 등장하고 있는데, 원본에 못 미치는 퀄리티를 논하기보다 우선 ‘뽕끼’ 아이돌은 파이가 매우 작은 시장이라는 점을 짚고 싶다. 각인이 쉬운 만큼 물리기도 쉬울뿐더러, 이 정도 ‘뽕끼’는 한 그룹만으로도 이미 길티 플레저 치사량 초과다. (티아라, 오렌지캬라멜, AOA, 모모랜드의 ‘뽕끼’ 전성기가 동시에 찾아오지 않았음을 기억하라.)
마노: 지금껏 꾸준히 그려왔던 ‘악몽 시리즈’의 ‘완결판’을 표방하고 있는 신보. 이전에도 ‘시리즈의 마지막’을 선언했던 적이 있었기에, 흔히 과제나 프로젝트 파일 이름을 두고 하는 우스갯소리처럼 ‘악몽시리즈_최종_진짜최종’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긴 하지만 앨범의 퀄리티만큼은 우습지 않다. 타이틀곡 ‘Piri’에서는 팀의 시그니처로 자리잡은 헤비메탈 사운드에 이번에는 트랩 비트를 접목했고, ‘Diamond’에서는 뭄바톤과 헤비메탈의 이종교합을 이루어냈다. 곡을 리드하는 ‘Piri’의 메인 테마와 음산한 드럼앤베이스 리듬, 웅장한 오케스트레이션이 인상적인 ‘Intro’부터 타이틀곡을 거쳐 앨범 내내 쭉 유지되는 치밀한 긴장감과 유기성은 시리즈와 세계관의 ‘종장(終章)’에 걸맞은 완성도를 보인다. 어느덧 하나의 경지에 이른 듯한 멤버들의 퍼포먼스 역시 탁월하다. 윤회하는 악몽 속에서 스스로 악몽 그 자체가 되길 선택한 소녀들의 서사를 암시하는 뮤직비디오는 마치 지금껏 펼쳐온 시리즈의 요약본 같기도. ‘악몽 시리즈’가 끝을 맞이한다니 개인적으로는 아쉽기 그지없으나, 모쪼록 그들이 어둑했던 소녀 시절을 잊지 않고서 새로운 길을 거침없이 헤쳐 나가길 간절히 바라본다.
미묘: ‘Piri’에서 다른 것보다 두드러지는 것은 그동안 드림캐쳐가 일궈온 음악적 진화다. 제시된 요소들을 단순조합했을 때 당장 떠오르는 것들은 분명 즉각 채택할 수 있되 리스크가 있었고, 그 함정에 매몰되지 않되 언저리에 위치한 아슬아슬함은 있었다. ‘Piri’는 그간 드림캐쳐에서 듣기 드물었던 드롭 형태의 훅 구성을 (‘힙합과 국악의 유사성’ 같이 애매한 공통점을 끌어올려) 메탈의 언어에 성공적으로 접목하고, 이를 다시 세련된 케이팝의 언어로 탈바꿈한다. 무뚝뚝한 랩과 미성의 보컬이 대조되는 틈새로 그룹의 목소리와 팀 퍼포먼스의 유전자도 충실히 반영한다. 완전한 불모지에서 출발한 드림캐쳐의 음악이 어느덧 하나의 완성체를 제시하기에 이른다. 그간 거쳐온 꾸준한 탐구와 자기개량에 경의를 표한다.
조은재: 특유의 카리스마를 잃지 않으면서도 스토리를 진전시키는 꾸준함 하나만은 분명 높은 평가를 받을 가치가 있다. 숨이 차도록 달리기만 하던 전작들에 비해 약간 다운된 템포에 차분한 듯 선이 굵어진 퍼포먼스는 어느덧 중견급으로 성장한 팀으로서의 위엄을 보여준다. 이 팀의 또 다른 주목할 점 중 하나는 음반 또한 일정한 무드와 테마를 유지하는 곡으로만 구성한다는 점이다. 장르적 변주를 줌에도 불구하고 드림캐쳐 특유의 서늘하고 도도하면서도 힘찬 이미지는 모든 트랙에서, 심지어 발라드곡 ‘Daydream’에서도 이어진다. 2년에 걸친 기획을 이 정도로 완벽하게 완성했다면, 새롭게 등장할 스토리 또한 기대할 수밖에 없겠다.
조은재: 날선 댄스 퍼포먼스로 대중에게 각인되었던 인피니트였기에 자주 지적되진 않았지만, 댄스 팝이 아닌 보컬 위주의 수록곡들은 템포가 느려질수록 치명적인 단점을 노출하곤 했다. 그래서 그나마 템포가 빠른 편인 ‘Julia’나 ‘Memories’가 인피니트가 소화할 수 있는 최대한의 ‘발라드 감성’이었다고 생각해왔는데, ‘Clock’은 로킹한 곡일수록 곡 자체의 분위기를 더 잘 살려내던 인피니트에게 맞춰준 곡이되, 인피니트가 소화해내지 못한 곡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한 명의 래퍼에게는 부담스러울 수준으로 길게 배정된 랩 파트도 의문스럽고, 후렴에서 충분한 폭발력을 발휘해야 할 유니슨은 힘이 부쳐 뭉치지 못하고 흩어진다. 청량감 넘치던 인피니트표 ‘떼창’을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고개를 갸웃할 만한 싱글.
스큅: 멤버들의 성장으로 키즈 그룹에서 하이틴 그룹으로 거듭난다고 소개했지만, 크게 달라진 지점이 보이지 않는다. 2009년 발매된 원곡과 비교해 들었을 때 서투름을 숨기지 않았다기보다 부러 서투름을 주문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는데, 이것이 과연 누구를 위한 ‘틴팝’이요 ‘하이틴 그룹’인지 진지한 고민이 필요할 때가 아닐까. 그리 유명하지 않은 10년 전 곡을 굳이 왜 리메이크했는지도 의문.
조은재: 최근에 발표된 여성 솔로 가수의 데뷔 싱글 중에선 가장 충격적인 작품. 마마무보다 사운드는 더 묵직하고, 퍼포먼스의 스케일 또한 확장되었다. 캐치한 사운드에 반복되는 키워드를 붙여서 각인시키고, 전체적으로는 서정적인 실연의 감성을 가득 채우는 것은 YG가 걸그룹을 흥행시키는 공식이기도 했는데, 화사라는 천재적인 퍼포머에게 그 공식을 적용하니 일종의 ‘치트키’가 된 느낌이다. 어쩌면 화사의 먼치킨적 천재성이 이미 치트키인지도 모르겠지만.
서드: 2PM에서는 비주얼 멤버로 여겨지던 닉쿤이 자신의 솔로 앨범에서 전곡을 작사 작곡했다는 점이 일단 주목할 만하다. 팬송 격인 ‘Umbrella’가 앨범 마지막에 보너스트랙처럼 수록된 걸 제외하면 모든 가사가 영어로 되어있다는 점은 글로벌한 시장을 의식했다기보다는 자신에게 가장 편한 언어로 노래를 전달하기 위한 좀 더 개인적인 선택으로 읽힌다. 상대적으로 흥겨운 분위기의 3번 트랙 ‘Bridge’와 다음 트랙 ‘Jealous’와의 연계가 다소 느슨하게만 다가올 수 있는 앨범 안에서 긴장감을 살짝 당기는 역할을 하고 있으며, ‘Endearing’의 곡의 전환에 맞추어 화음을 쌓아 올리는 후반부가 인상적. 전반적으로 빠르지 않은 템포의 듣기 편한 곡으로 채워져 있으며 피처링도 없어 그의 목소리에 온전히 집중해 감상할 수 있는 만큼 팬들에게는 이만한 서비스도 없을 듯하다.
심댱: 화자는 ‘너’를 향한 노래를 하면서 이는 위로나 동정에서 비롯된 게 아니라고 대놓고 말한다. 하지만 노래를 따라가 보면 ‘너’는 곧 ‘나’처럼 들린다. 왜, 누군가를 향한 조언이나 위로가 사실은 나를 향한 것일 때가 있지 않은가. 고민 많은 20대를 연상시키는 문장은 청하와 라비라는 20대 아티스트의 발화를 만나 묘한 진정성을 건드린다. 한편 두 아티스트는 대조적이면서도 서로를 보완한다. 라비가 골라낸 투박한 단어들과 그 위를 공기처럼 노니는 청하의 보컬이 어두운 가사와 밝은 멜로디의 대조에 들어맞는 것처럼 말이다. 길고 어두운 통로를 걷는 청춘에게 권해야 할 것은 힐링이 아니라 자기애일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그런 트랙.
미묘: 시간이 보다 효율적으로 사용될 여지가 있다는 생각이 드는 대목들이 있다. 그러나 지금 몬스타엑스가 지향하는 것은 내일이 없다는 듯한 팝적 쾌감을 온몸으로 쏟아붓는 데 있다. 팝은 팝으로서 소비하는 이가 가장 많기에 팝이라는 점에서, 그리고 몬스타엑스는 이를 너끈히 수행해 낼 자질을 갖춘 팀이라는 점에서, 찬성을 표한다. 강약을 조절하면서도 강-강-강을 이어가고 싶다는 듯한 ‘Alligator’가 일견 과한 듯 느껴지면서도, 듣고 나면 숨이 찬 저돌성만큼은 납득하고도 남는 대목이다. 스티브 아오키가 참여해서만이 아니라 단연 클럽 뮤직 그 자체의 질감을 담아내는 ‘Play It Cool’이나, 비트마저 편곡 요소로서의 기능과 극적 표현의 사이에 걸치며 뮤지컬적인 연출을 담아내는 ‘악몽’ 등은, 그러면서도 몬스타엑스의, 그리고 케이팝의 표현 범위를 넓혀내는 데 성과를 거두고 있는 트랙들.
서드: 전작 ‘나이&키’에서도 인상적인 그루브를 보여줬던 트레이가 발매한 첫 미니앨범. 타이틀곡 ‘멀어져’는 도입부부터 뻗어 나가는 보컬과 심플한 사운드가 귀를 사로잡는다. 새롭거나 파격적인 무언가를 보여준다기보다는 익숙한 장르와 사운드를 매끈하게 소화해내는 장점을 지닌 미니앨범. 전체적으로 일관된 완성도에 듣기 편한 곡들로 채워졌다. 굳이 단점을 찾자면 수록곡 중 ‘아가씨’의 감성이 조금 올드하게 느껴진다는 점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또한 신사동 호랭이가 총괄 프로듀서로 참여했는데, 작곡보다는 주로 편곡으로 참여한 점이 눈에 띄는 부분.
마노: 마치 서로 다른 색상과 채도의 양면 색종이와 같은 구성의 앨범. 전작이며 데뷔작인 “[+ +]”의 리패키지 형태를 취하고 있으면서, 앨범의 후반부에 전작의 트랙들을 역순으로 배치했다는 점이 흥미롭다. 시작하자마자 분위기가 고조되는 ‘Hi High’와 달리 ‘Butterfly’ 및 새로운 수록곡들이 일관적으로 다소 칠(chill)한 무드를 보이고 있기에, 순서대로 갈수록 차분한 곡조로 떨어지는 경향이 있었던 “[+ +]”의 구성을 역으로 뒤집은 것은 현명한 전략인 것으로 보인다. 새로운 수록곡의 면면 역시 훌륭한 것은 물론, 타이틀곡 ‘Butterfly’에서 엿보이는 다양성에의 긍정과 팀으로서의 진보는 분명 이 앨범과 프로덕션을 한층 더 빛나게 만들고 있다. 다시 한 번, 이제 막 시작된 그들의 “작은 날갯짓”이 늘 순풍과 함께 하길 바라며 Pick!을 보낸다.
스큅: ‘Butterfly’의 화성 진행은 반음 간격의 2개 코드(Eb7-Dm7)만을 반복하는 “작은 날갯짓”의 형태에 불과하지만, 그 가운데 멜로디의 진폭과 사운드의 낙차로 “허리케인”의 역동을 도출해낸다. 이 에너지는 속삭이는 듯한 가창으로 단단히 응집되고, 거대한 하나를 그리는 퍼포먼스와 뮤직비디오를 통해 발산된다. 서 말 구슬을 차마 꿰어내지 못했던 데뷔 미니앨범에 대한 아쉬움을 상회하고도 남는 결과물이다. 다시 말해, ‘Butterfly’는 주야장창 ‘에네르기’만 모으다 스러져버리는 듯하던 순간 내놓은 회심의 ‘파’다. 이후로는 치밀한 세계관을 그리는 ‘위성’, 충격파의 쐐기를 장식하는 ‘Curiosity’ 등 여진을 이어받는 곡들이 이어지고, 이전 미니앨범 “[+ +]”의 수록곡들까지도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사실 자연스러움을 넘어서 “[+ +]” 때보다 더 높은 흡인력과 설득력을 자랑한다. 이는 분명 미시적인 차원의 세계관 스토리텔링을 본 콘텐츠에 무리해서 끼워 넣지 않고 티저 영상과 같은 부가 콘텐츠 내지는 사소한 설정(“[+ +]”를 역순으로 이어 붙인 트랙배치, 연속성을 살린 앨범 제목 “[X X]”, 정월대보름에 맞춘 발매일자 등)을 통해 풀어낸 덕이다. 여러모로 “XOXO” 때의 엑소와 “Empathy” 때의 NCT가 떠오르는 전략. 이후 엑소와 NCT는 현실적인 문제로 세계관을 깨뜨려야만 했기에, 현재로서는 이달의 소녀가 아이돌 판타지 세계관의 최전방을 점하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이들은 앞으로 얼마나 더 뻗어갈 수 있을까. 최근 공개된 MTV와의 인터뷰에서 하슬은 “이 거대하고 체계적인 세계관이 이달의 소녀를 특별하게 만들어준다고 생각한다”며 세계관에 대한 자부심을 드러냈고, 이브는 “우리는 젠더, 인종, 국적을 뛰어넘고자 한다”는 포부를 전하기도 했다. (이때 세계관 상 이브와 츄의 관계를 적극적으로 재해석한 LGBTQ+ 팬들을 향해 감사인사를 전하기도 했는데, ‘퀴어베이팅’만이 성행하던 아이돌 씬의 당사자가 직접 이런 언급을 했다는 것은 분명 고무적이다.) 퍼포머 스스로에게 콘텐츠에 대한 확신이 깃든 이상 세계관은 견고하게 유지될 것이다. 콘텐츠 자체의 탁월함과 더불어 수록곡과 세계관에 대한 재발견의 의미를 담아 Pick과 Discovery를 함께 부여한다.
심댱: 전작과 함께 들어보니 ‘이달의 소녀’라는 책을 거꾸로 뒤집어 다시 읽어가는 것 같다. 마치 맨 마지막 장부터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되는 잡지 같은 구성인데, “[X X]”와 “[+ +]”가 포개어져 오묘한 인상을 남긴다. ‘Hi High’에서 선보였던 귀여운 표정은 ‘Butterfly’의 시크한 몸짓과 상충하는 한편 섬세하게 쌓은 음의 조화는 수록곡 ‘색깔’과 ‘Stylish’에서 찾을 수 있다. 몽환적인 앞면에 발랄한 뒷면이 존재해 복합적인 팀 컬러를 부여한다. 유닛의 종합, 그 이상을 보여준 균형감이 매력적인 한 장.
마노: 최근 많은 걸그룹이 수트 의상을 시도하고 있는데, 앨범 아트와 뮤직비디오 중간에 수트를 입고 등장하는 팀의 모습이 우선 눈에 띈다. 강렬한 곡조와도 잘 어울리는 차림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걸그룹 하면 흔히 떠올릴 수 있는 스커트나 핫팬츠 차림보다는 이쪽을 더 적극적으로 시도했으면 좋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다. 서태지와 아이들 레퍼런스로 읽히는 가사(“우린 아직 젊기에”)와 지극히 ‘요즘’식인 힙합-EDM-레게톤 장르가 공존하는 점이 꽤 묘하게 보이기도. 멤버들의 곡과 퍼포먼스 수행력도 부족하지 않고 곡도 잘 빠져 있지만, 결국 듣고 나서 돌아서면 ‘무엇을 들었더라?’ 싶어지는 고만고만한 평작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어 안타깝다. 모든 것이 꽤나 준수한데다 전반적으로 크게 모난 부분도 없지만, 여러모로 2년 반이라는 긴 공백기를 채우기엔 역부족인 싱글.
조은재: 타이틀곡 ‘In the Rain’은 어쩐지 〈프로듀스 101〉 시즌 2의 ‘소나기’ 경연 당시의 윤지성을 떠오르게 하는 싱글. ‘소나기’ 때와 마찬가지로 윤지성은 수려하고 화려한 보컬은 아니지만, 곡이 가진 감성을 가감 없이 전달하기엔 충분한 보컬이다. 편하게 듣기 좋은 R&B 위주로 구성된 앨범은 대단히 대단한 것을 보여주겠다는 욕심보다, 할 수 있는 것을 주어진 것 안에서 충분히 보여주겠다는 정직함이 묻어난다. 꽤나 영리하게 만들어진 미니앨범인데, 애초에 윤지성이 인기를 끌었던 이유도 그런 영리함에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마노: 신나는 파티튠에 영어 가사를 얹었던 ‘Flash Me’, 미니멀한 어쿠스틱 발라드 트랙이었던 ‘Because of You’에 이은 세 번째 싱글. 솔로 활동을 시작한 이래 작사 작곡 크레디트에 본인의 이름을 꾸준히 올리고 있다는 점이 눈에 띈다. 본인이 창작한 동화를 모티브로 가사를 썼다고 하는데, ‘훨훨’이라는 단어에서 쉽게 떠올릴 수 있는 희망적인 메시지가 시원하게 뻗어 나가는 멜로디와 청량하고 신나는 곡조에 잘 어우러진다. 쉽사리 예상할 수 있는 조합이고 특별히 새로울 것 없는 요소를 모아 놨지만, 무섭도록 치솟는 고음을 아무렇지 않게 불러내 버리며 정말로 훨훨 날아버리는 김보형의 가창력을 감상할 수 있다는 것이 가장 큰 미덕이 아닐까.
심댱: ‘입꼬리’를 보면 (전작 ‘Nice Body’보다는 덜 노골적일지라도) 효민은 미디어가 그려내는 티피컬한 여성을 빼어나게 구현한다. 이것도 일종의 재능이라 볼 수 있지 않나 싶다. 화려한 비주얼에 하이톤의 목소리로 연출된 여성 모델. 그렇지만 그는 그간 컬러를 전면적으로 드러낸 싱글 기획으로 새로운 도전을 선보인 바 있다. ‘Mango’로 콘셉추얼한 면모를, 뒤이어 ‘으음으음’으로 스포티하면서도 자유분방한 이미지를 시도했다. 이번에는 ‘입꼬리’의 재즈버전이 미니앨범의 처음을 장식했는데, 기자 간담회에서 재즈에 대한 애정을 드러내면서 언젠가 재즈로 앨범을 채우고 싶다는 그의 답을 떠올려보면 그 나름대로 도전하고 있는 게 아닐까 싶다. 다만 바라는 것은 그가 좀 더 밀어붙였으면 한다. ‘입꼬리’의 재즈 버전에서 묻어나온 자신 있는 목소리처럼, 좀 더 욕심내서 질러낸다면 더 좋은 결과물을 낼 수 있을 거라는 아쉬움이 있기 때문이다.
하루살이: 이렇게 팬들의 니즈를 교묘하게 비껴가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다. 청담 섹시를 기대한 이들에게 ‘예뻐지지 마’는 상당히 실망스럽다. 창작자가 아무리 좋은 의미를 담았어도 감상자에게 전달되지 않는다면 그 의미는 힘을 잃는 법이다. 가사는 상당히 직접적으로 의미를 전달할 수 있는 수단이지만 ‘예뻐지지 마’는 그 부분을 완전히 실패했다. (곡 소개와 작사가의 원래 의도가 일치한다면 말이다.) 수록곡들의 완성도는 준수하지만 한 음반으로 묶기엔 일관성이 전혀 없다. ‘하필’의 다이내믹한 전개와 한 옥타브 뛰었다가 다시 툭 떨어지는 멜로디 라인은 분명 귀를 사로잡고 ‘Life is so beautiful’은 인상적이진 않지만 전작의 매끈함을 지니고 있다. SF9의 숨은 주특기라고 할 수 있는 R&B 장르의 ‘무중력’은 팬송이지만 담백하니 듣기에 거북하지 않다. 각각 뜯어보면 매력적인 곡들이라 아쉬움이 더 크다. 지난 미니앨범을 통해 비로소 답을 찾은 듯 보였으나 다시 미궁에 빠져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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