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돌로지 필진 단평. 일급비밀, 엑소, K/DA, 트와이스, 플로어스, 구구단, 키, MXM, 드림노트, 식스밤, 윤종신&유주, H.U.B를 다룬다. 이번 회차부터 하루살이가 새 필진으로 합류했다.
미묘: 힙합 비트에 처절한 R&B, 10년 전에 유행하던 소스들이 조합됐다. 얄쌍하고 야시시하게 연출된 보컬이 질감을 가볍게 하지 않았더라면 꽤 낡게 들렸을 것이다. 멜로디도 화성 내에서 익숙한 패턴을 기악적으로 찾아가는 초심자들의 버릇이 느껴져서 크레딧을 봤더니 스윗튠.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가 싶다. 트렌드와 동떨어졌다는 게 꼭 ‘나쁜’ 일은 아니지만, 현재에 듣기에 반드시 구차할 요소들을 그렇게 들리지만은 않게 뒤바꿔 놓는 내공을 보여주려는 의도가 아니라면 애초에 다른 방향을 잡아도 됐던 게 아닐까.
마노: 앨범 발매 소식을 들었을 때만 해도, 솔직히 엑소라는 그룹이 지금까지의 디스코그래피 그 이상의 무언가를 보여줄 수 있으리란 기대가 없었다. 그러나 ‘Tempo’를 듣자마자 이 모든 것이 나의 오만이었음을 절절히 깨닫고 말았다. 소녀시대의 ‘I Got A Boy’ 등을 떠올리게 하는 곡 구조는 변화무쌍하고 예측불가하되, 곡 전체를 꿰뚫는 유기성으로 인해 흐름이 난잡하거나 어수선하지 않으서 곡으로 하여금 어떠한 설득력을 갖게 한다. 브리지 후에 잠깐의 정적을 두고 또 한 번 “둠둠둠둠-“하며 아카펠라가 울려 퍼질 때, 놀라움 내지는 충격에 휩싸인 분들이 적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한다. 대단히 실험적이라고 하긴 어려울지 몰라도, 용감하고 신선한 접근이라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이후부터 앨범을 쭉 메운 수록곡들 역시 제목 그대로 앨범 전체의 흐름을 흐트러뜨리지 않는 범위 안에서 고른 퀄리티를 자랑한다. ‘Sign’, ‘Gravity’, ‘Damage’ 등 케이팝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쉽사리 외면하지 못할 트랙들은 물론, 다소 빽빽한 흐름 사이에서 ‘24/7’, ‘여기 있을게’ 등 적절히 쉼을 주는 트랙들이 조화롭게 공존하고 있다. 끝자락에 위치한 ‘Oasis’는 ‘El Dorado’(“EXODUS”)의 후일담처럼 들리기도 하는데, 특유의 신비롭고 신화적인 무드와 잔잔한 비장미가 잊기 힘든 여운을 남긴다. “I’m on the road”라는 노랫말처럼, 여전히 그들만의 길 위에 있는 엑소가 향할 다음 장소가 궁금해진다.
서드: 엑소 음악의 강점은 다름 아닌 목소리 그 자체라는 자신감이 아카펠라로만 이루어진 ‘Tempo’의 중반부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창법은 닮아도 음색은 뚜렷이 구분되는 목소리의 층이 겹쳐지면서 만들어내는 매력은 스쳐 지나가며 들어도 엑소의 노래임을 알 수 있는, 다른 케이팝에서는 쉽게 찾아 듣기 힘든 엑소만의 시그니처다. 수록곡 역시 익숙한 스타일의 곡들로 채우면서도 퍼포먼스가 머릿속에 그려지는 듯한 SMP 사운드의 곡들과, 멜로디와 화음이 강조된 곡들이 교차하듯 배치되어 있다. 벌써 다섯 번째 정규앨범이지만 아직 더 발견할 엑소가 있다는 설렘과 기대감을 주는 꽉 찬 정규앨범이다.
스큅: 우선 타이틀곡 ‘Tempo’ 얘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예상을 뒤엎는 곡 전개가 소녀시대의 ‘I Got A Boy’, 레드벨벳의 ‘Ice Cream Cake’, NCT 127의 ‘Cherry Bomb’과 같은 곡들을 연상시키기도 하지만 그 어느 때보다도 군더더기 없는 봉합력을 자랑한다. 특히나 하프타임으로 훅에 변주를 준 뒤 처절한 브리지를 거쳐 기어이 아카펠라로 강렬했던 도입부를 다시 호출하고야 마는 후반부 흐름의 쾌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 근래 SM 송캠프에서 영혼을 갈아 넣었다는 인상을 주는 곡들이 매년 하나씩 나오고 있는데, 이번 년도는 단연 ‘Tempo’를 꼽을 수 있을 것 같다. 수록곡으로 시선을 돌리면 선 로고 후 앨범 제작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앨범 내내 로고와 합일된 질주감이 돋보인다. ‘Sign’과 ‘Damage’의 ‘알레그로’, ‘Tempo’와 ‘24/7’의 ‘모데라토’, ‘여기 있을게’의 ‘안단테’ 등 다양한 템포의 질주감이 고루 분포해 있어 취향 따라 골라 듣는 맛 역시 상당하다. 전체적으로 2, 3집을 닮아 있어 4집을 좋아했던 이들은 약간의 아쉬움을 표할 수도. 추천곡은 3집의 핵심적인 사운드를 구축했던 런던노이즈(a.k.a. 서울소음)의 ‘Gravity’와 2집 ‘El Dorado’의 후속작 격으로 들리는 ‘오아시스’.
심댱: 후렴구에서 신경을 자극하는 샘플(일명 할머니 의자 소리)와 보컬을 뒤덮어 팬덤의 원성을 산 기계음. 게다가 한 치 앞도 예상할 수 없는 비트와 복잡한 구조는 ‘Tempo’라는 블록버스터를 만들어 냈다. 앞서 언급한 요소는 청자에게 불친절하지만, 속도감 있는 전개에 까칠함을 더해 듣는 재미를 준다. 갑자기 보컬을 앞으로 끌어와 슬로우다운, 거기에 아카펠라로 풍성히 쌓아 올린 브리지는 가장 이질적이나 곡에 방점을 찍으며 하이라이트를 장식한다. 타이틀곡 하나만 알고 가도 충분하지만 트랙 리스트를 차근히 따라가면 엑소(라는 장르)를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수록곡 곳곳에 숨겨진 세계관은 한 멤버를 곡의 주인공으로 짚어내는 책갈피처럼 기능한다. 예를 들어 ‘후폭풍’에서 서로 다른 습도를 가진 보컬이 일으켜내는 바람을 느낄 수 있는 한편 (바람의 능력을 가진) 세훈의 파트를 주의해서 듣게 되는 식이다. 물론 그런 설정을 넘긴다 해도 트랙은 설득력 있게 전달되지만, 세계관이라는 필터를 겹쳐볼 때 새로운 감상을 만날 수 있으리라. 전작 “Exodus”와 결이 비슷한 듯 직관적인 터치로 상상력을 자극하는 흐름에 Pick! 을 남긴다.
마노: 분명 잘 알려진 국내외 작곡가진이 참여했을 것이라 생각하고 크레딧을 살펴봤다가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익히 알려진 대로 유명 온라인 게임 <리그 오브 레전드>의 새 스킨 주제가로 발매된 곡이며, 제작사인 라이엇 게임즈의 인하우스 뮤직팀이 프로듀싱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유명 작곡가진의 힘을 빌리지 않고도 그럴싸함 이상의 수준을 담보하는 케이팝을 내놓았다는 점이 일견 놀랍지만, 곰곰히 생각해보면 그렇지만도 않다는 생각 역시 든다. 케이팝이 어느덧 어엿한 하나의 서브컬처로 자리 잡았다는 방증이고, 그렇기에 이것에 어떠한 리스펙트를 가지고 상당한 시간과 노력을 들여 디깅했을 경우 나올 수 있는 가장 준수한 결과물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곡은 분명 케이팝이다. 그것도 아주 치밀하고 섬세하게 조형된. 굳이 언급하는 것이 무의미하게 느껴질 정도로 (여자)아이들의 두 멤버들은 제 몫 이상을 해내고 있으며, 탁월하지 않은 적이 없었던 전소연의 래핑은 물론 본체 활동 때와는 사뭇 다른 미연의 음색도 매우 매력적이다. 감히 외면하기 어려운 쾌감과 짜릿함을 (혹시라도 놓치고 계셨다면) 꼭 놓치지 마시라는 뜻으로 Discovery!를.
미묘: 서슬 퍼런 사운드의 날이 닥치는 대로 썰어댄다. 난폭하고 히스테릭하며 공격적인 사운드는 그러나 ‘잘라냄'을 통해 완성된다. 숨 가쁘게 치닫는 중, “K”와 “DA”, “Pop”과 “Stars”처럼, 한 호흡 기다렸다가 통쾌하게 날려버리는 속도감. 결정타를 날릴 순간을 미리 정해놓고, 그 지점을 향해 모든 에너지를 광포하게 쏟아붓는 듯하다. 그래선지 게임과 팝이 제공하는 쾌감의 원형을 겹쳐서 보여주는 것 같기도. 음악이 워낙에 케이팝이면서도 현실적으로 씬과는 다르다 보니 평행우주의 케이팝이 여기 있었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이 곡과 같은 폭력성은 정작 케이팝에서 보이그룹이 행할 수는 없는 어떤 것이기도 하고, 날카로움과 파워풀함 모두 여성 가수의 그것일 때 유난히 빛날 만한 재료이기도 하다. 단 한 번만 만나기에는 꽤나 아까운 조합식.
조은재: ‘Pop/Stars’의 뮤직비디오와 공연 실황을 보며, 어쩐지 브리트니 스피어스, 비욘세, 핑크가 콜로세움에서 퀸의 ‘We Will Rock You’를 불렀던 펩시의 커머셜이 생각났다. 우먼파워를 보여준다는 점 말고도, 펩시와 LOL 두 브랜드의 광고 타깃이 상당한 교집합을 갖기 때문일까. 10여 년의 세월이 지나오는 동안, 전 세계 젊은이가 즐겨 듣는 장르는 록에서 케이팝으로 대체되었고, 우리가 사랑해온 캐릭터로서의 미국 팝스타들은 무대에 홀로그램으로 등장해 춤까지 추는 게임 캐릭터로 대체되었다. 따라서 캐릭터에게 케이팝 스킬을 전수해줄 아이돌은 본인이 굳이 톱스타일 필요는 없지만, 톱스타가 될 캐릭터의 위상에 걸맞은 실력을 갖춘 아이돌일 필요가 있었겠다. 그리고 (여자)아이들의 두 멤버들은 적합한 스킬을 갖고 있었고, 아리와 아칼리에게 좋은 ‘궁극기’가 되어주었다. 케이팝이 팝 시장 안에서 어떻게 인식되고 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활용될 수 있는지 가장 직관적으로 보여준 사례.
스큅: 수동적인 태세를 벗어나 ‘Dance The Night Away’ 때의 당찬 기운을 유지한 것은 반갑지만, 들으면 들을수록 결국 (남성) 청자에게 선택을 내맡긴다는 점에서 핵심은 달라지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태도의 미묘한 차이가 있을 뿐 곡의 구조-기조-어조에는 전혀 변함이 없다. 그래도 소구가 되기 때문에 계속해서 이런 곡들을 내놓는 것이겠지. 이제는 그저 ‘Signal’과 ‘What is Love?’처럼 멤버들의 생동감마저 짓눌러버리는 일만은 없기를 바랄 뿐이다. 그러기에는 멤버들의 에너지가 너무 아깝기 때문. 이번 앨범에서는 지효가 유독 마음에 밟힌다. 벅차올라 쨍하게 뿜어내는 ‘Sunset’의 보컬은 결코 잊지 못할 것.
조성민: 사실 아이돌의 음악적 성장은 상업적 성과의 진전과 별다른 상관관계를 만들지 않는다. 하지만 트와이스는 날로 커지는 팬덤으로부터 에너지를 받기라도 하는 듯 점점 더 멋진 아티스트로 완성되어 가고 있다. 멤버들이 적극적으로 작사에 참여한 점도 눈에 띄지만, 사실 가장 주목해야 할 것은 데뷔 초부터 트와이스의 무기로 꼽혔던 밝고 쾌활한 에너지는 그대로 유지하면서 주어진 악곡을 전보다 훨씬 자연스럽고 능숙하게 소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개인적으로는 노력과 성장도 재능의 영역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런 점에서 “YES or YES”는 트와이스처럼 재능있는 걸그룹이 또 나올 수 있을지 의문을 갖게 하는 앨범이다. 이미 정점이지만, 더 나아갈 앞으로에 대한 기대가 크다.
미묘: 성북구에 기반을 둔 사회적 기업 엶 엔터테인먼트에서 제작한 4인조 걸그룹의 데뷔작. 곡은 연인과 함께하는 마음이 용기가 된다는 낙관적 메시지를 담고 있고, 보컬 연출은 수수하다. 곡 자체를 이러쿵저러쿵 평하기에는, 노래방에서도 이런 사운드를 들은 지는 꽤 오래됐음을 아픈 마음으로 지적할 수밖에 없다. 일종의 ‘인디 아이돌’ 내지는 자본의 문제라고만 생각하기는 어려운 게, 정말로, 2018년의 컴퓨터 음악 기술이라면 이런 사운드가 나오지 않는 게 정상이다. 편곡이 제 기능을 하고 있는 부분도 별로 없다. 글쎄, 이런 사운드와 연출이 예스러운 정감이 있어서 힐링의 메시지를 줄 수 있다고 믿을지는 모르겠지만, 수수하고 촌스러운 게 무해하다는 건 아저씨들의 관념일 수밖에 없다. 그것을 젊은 여성에게 씌워 입히는 게 사회적이고 선량한 일일까?
마노: 특히 2018년을 기점으로 걸그룹의 스펙트럼이 다양하고 복잡해지는 것 같은데, 분명 고무적이고 긍정적인 현상이다. 전작 ‘The Boots’에서는 보다 보편적으로 해석될 여지가 많은 임파워링 메시지를 담았다면, 이번 ‘Not That Type’에서는 연애의 주도권을 꽉 쥐고 마구 휘몰아치는, 노랫말 그대로의 “당돌한 소녀”를 연출하고 연기하고 있다(올초 발매된 위키미키의 전작(http://idology.kr/9940)이 떠오르기도 한다). 수록곡에서도 톤앤매너는 미묘하게 다르되 ‘능동적이고 당당한 소녀’라는 기조에서 벗어나지 않는 모습을 꾸준히 보인다. 단지 이 ‘능동적이고 당당한 모습’이 소위 말하는 ‘걸크러시(마음에 드는 단어 선택은 아니지만, 달리 표현할 만한 어휘가 없으므로 부득이 사용하기로 한다)’, ‘쎈’ 음악으로만 대표되는 것은 역시나 또 다른 납작함을 낳을 뿐이라는 점을 되짚어볼 필요는 있다. “난 있잖아 걔네들과는 달라/고분고분하게 상냥하게”라는 가사도 어딘가 마음에 걸린다. 이렇듯 한계점도 존재하지만, 그럼에도 분명 구구단의 본작이 걸그룹이 가질 수 있는 다양성의 층위를 풍성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가진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일견 말랑하고 마냥 화사해 보이지만, “매서운 바람이 몰아치는 밤도 두렵지 않다”는 말을 심지 굳은 미소와 함께 전하는 ‘Pastel Sweater’가 빛나는 이유는 그래서다. 다양한 소녀의 모습을 연출하고 연기하는 구구단의 ‘극단’ 콘셉트가 소중한 이유 역시 그러하다. ‘나다움’을 역설하는 ‘Be Myself’, 공격적이고 저돌적인 ‘Shotgun’, 발칙하고 발랄한 ‘Do it’ 등 놓치기 아까운 트랙으로 가득한 것은 덤.
미묘: ‘아무튼 예쁘고 특이하면 되겠지' 하는 듯하던 데뷔 당시에 비해 ‘The Boots’와 ‘Not That Type’은 제법 음악적 노선의 정립이 있다. 마침 젤리피쉬가 잘할 수 있는 것이다. 탄탄하고, 조금은 보수적으로 느껴질 법도 한 ‘정통 팝송'을 만드는 것 말이다. (데뷔 초의 ‘일기'부터 이번의 ‘Pastel Sweater’까지 이어지는 흐름만 해도, 다른 어떤 기획사와도 확연히 그 질감이 다르지 않은가.) 이 EP는 분명 더 밟을 수 있을 것 같으면서 끝끝내 밟지 않는 영역들이 있다. 무대를 확 뒤집어 엎어버릴 기세에 단단한 틀을 덧씌워둔 것 같다고 할까. (그래서 다시 ‘극단'처럼 느껴지기도 하는 걸까?) ‘Not That Type’이 펜타토닉으로 블루지한 느낌을 더한 것은 그래서, 틀을 벗어나지 않되 틀에 억눌리지는 않는 단단한 심지를 가진 캐릭터로 다가온다. “호!”가 유난히 멋지게 다가오는 것 역시 흥에 겨운 외침이 아니라, 뒤집는 건 자기 자신이라는 자신감의 표현 같기 때문이다. 터뜨릴 듯하지만 끝내 으름장을 놓으며 긴장감에 집중하는 ‘Shotgun’도 마찬가지. 구구단은 ‘예쁜 걸그룹'이길 내려놓을 의향이 없는 듯하고, 그러면서도 자심감 있게 무대에 올라 관객을 뒤흔드는 인물상을 보여주려 한다. 쉽지 않은 길, 하지만 선명한 진보가 담긴 미니앨범이다.
서드: ‘Not That Type’은 사운드는 무척 흥겹고 에너지 넘치지만 단순한 구성과 귀에 걸리는 멜로디 라인의 부재가 아쉽다. 그로 인해 곡의 매력보다는 가사가 지닌 메시지가 전면으로 나와버리는 인상을 준다. 보컬과 랩의 매력을 살리면서 콘셉트로 승부하고 싶었다면 차라리 수록곡 중 ‘Shotgun’이나 ‘Do it’을 선택해도 좋았을지 모른다.
대중의 반응을 이끌어내지 못하는 원인은 결국 팀 컬러의 부재다. 매번 다른 콘셉트를 시도한다는 말은 얼핏 그럴싸하게 다가오지만, 반대로 ‘Not That Type’을 좋아하더라도 다음번에 또 이런 음악을 들려준다는 보장이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이제는 정말 대중에게 다음번을 안심하고 예측할 수 있는 그룹만의 자리를 찾아 정착할 때가 됐다. ‘너에게’나 ‘Pastel Sweater’은 올해 발표된 걸그룹 음반 수록곡 중 망설임 없이 상위권에 올려놓을 수 있는, 쉽게 놓치기엔 아쉬운 결과물이다. 구구단이 ‘여기까지 해낼 수 있는 팀’이라는 걸 대중에게 좀 더 알릴 방법에 대한 좀 더 적극적인 모색이 필요하다.
조성민: 꾹꾹 눌러 찍는 비트와 힘있게 지르는 보컬에도 불구하고, ‘Not That Type’은 어쩐지 힘이 빠지는 곡이다. 바쁘게 쏟아내는 강렬한 가사는 청자가 특정되어 있지 않아 고개를 갸웃하게 되며, 심지어 다소 촌스러운 감마저 있다. 일찍이 걸스데이가 “여자가 먼저 키스하면 잡혀가는 건가”로 ‘당돌함’의 정점을 찍은 바 있었으므로, “네가 내 맘에 든대” 정도로는 그다지 ‘저돌적’으로 느껴지지 않는 시대가 됐다고 봐야 한다. 당돌하고 저돌적이라는 가사의 주장에 비해 차분한 정박으로 선이 예쁘게 떨어지는 안무 또한 시청자의 인지부조화를 야기하는 부분. 데뷔 후 2년간 ‘Wonderland’부터 ‘Not That Type’까지, 디스코그래피를 관통하는 일관된 캐릭터가 없는 것 또한 치명적인데, 이것은 철저히 기획자가 담당해야 할 부분이므로 결국 ‘기획력의 부재’로 환원될 이야기겠다.
스큅: 상쾌한 보컬 루프로 포문을 열면 습습한 소유의 목소리가 미끄러져 들어오고 곧 키의 알싸한 음색이 퍼진다. 이어지는 후렴구는 단순하기 그지없지만 키의 단단한 가창을 소유가 가볍게 받쳐주며 기분 좋은 (정확히 말하자면 기분이 좋아지지 않을 수 없는) 상승감을 자아낸다. 곡이 단조롭게 흐르지 않고 산뜻하고 편안하게 유지되는 것은 8할이 두 보컬의 케미스트리 덕분. 듣기 전까지만 해도 둘의 보컬이 잘 어우러질지 의문이 있었는데, 자칫 둔탁해질 수 있는 키의 옹골진 음색에 소유가 부력을 주입해 청량감의 촉매 역할을 톡톡히 해주고 있다. 훌륭한 작곡가가 만들고 훌륭한 보컬이 완성한 훌륭한 팝. 간단해서 단번에 각인되고 여러 번 반복해 들어도 쉽사리 물리지 않는다는 점에서 ‘가장 효과적인 팝’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하루살이: 의외로 키의 솔로 ‘데뷔’곡이다. 키의 역량을 생각하면 솔로 데뷔가 늦게 이뤄졌다는 생각이 든다. 트로피컬 하우스가 스쳐 지나간 트랙은 몽롱한 소유의 목소리와 청량한 키의 목소리를 제법 잘 어울리게 만든다. 장르 특성상 계절감의 측면에서 아쉽다고 느껴질 여지도 있지만 10년 넘도록 상큼한 소년에게 계절 따위는 아무래도 좋다. 후렴의 단순한 멜로디와 가사가 귀에 박혀 쉽게 흥얼거리게 된다. 어울리는 것, 잘하는 것, 자신이 보여주고 싶은 것과 팬들이 보고 싶은 것 사이에서 절묘한 균형을 이뤄내는 키의 내공과 영리함이 돋보인다.
미묘: 단출한 세 곡인 것 같지만 꽤 밀도가 좋다. ‘Knock Knock (TAK Remix)’는 느긋한 멜로디를 TAK 특유의 리조넌스 후비는 빽빽함과 격투 게임의 연속기 같은 힘 조절로 휘몰아친다. ‘다르게 보여’는 나긋나긋한 멜로디를 타이트하게 조인 비트에 실어 흘려보내면서 후렴에서 좋은 속도감을 선보인다. 그리고는 제목이 ‘세레나데’인데 ‘너의 세레나데를 들려달라’는 내용인 점이 이색적인 ‘세레나데’로 달콤하고 편안하게 마무리된다. 팀과 프로덕션의 강점을 잘 살려 나열하면서도 이를 효과적으로 조합해 압축한 한 장.
스큅: ‘소녀’ 콘셉트의 세분화와 다양화가 이루어질 대로 이루어진 가운데서도 색다른 ‘한 끗’을 보여주는 그룹이 계속해서 나오고 있다. 드림노트는 최근 아이돌 씬에서 눈에 띄는 ‘당찬 소녀상’에서 ‘당참’ 지수를 극도로 끌어올린다. 다소 동요 같기까지 한 멜로디와 챈트, 율동과 치어리딩의 중간 지점에 놓인 듯한 직선적인 안무, 무대 끝까지 팽팽하게 유지하는 텐션까지. 이토록 천진난만한 그룹이 있었나 생각해보지만 쉽사리 떠오르지 않는다. 기껏 생각나는 것이 〈프로듀스 48〉에 나왔던 야마다 노에 정도. 노에가 한국 걸그룹으로 데뷔했다면 드림노트와 엇비슷한 모습이 아니었을까. 오마이걸을 맡았던 최재혁 프로듀서의 도움을 받았다고 들었는데 오마이걸에서 신비로움을 덜어내고 트와이스와 소나무의 기운을 더한 것 같기도 하다. 여자친구와 러블리즈가 그랬듯 몇 달 전 데뷔한 네이처와 선의의 경쟁 구도를 이룰 수 있을 것 같아 더욱 기대되는 팀.
조은재: 힘있게 터져 나오는 밴드 사운드에 반짝이는 신스, 설렘을 담아 외치는 구호에 맞춰 하늘을 찌르는 손동작까지. 분명 클리셰인데, 확신에 차서 제시하기에 여지없이 수긍하게 된다. 4곡으로 꽉 채운 맥시 싱글은 분명 ‘뭘 좀 아는 사람’이 만든 태가 나는데, 멤버들의 실력 또한 출중해 사장님의 ‘빅 픽처’를 그려나가기에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올해 들은 데뷔 싱글 중에서는 단연 최고.
하루살이: 여느 중소 기획사에서 처음 만든 여자 아이돌에게 흔히 기대할 수 있는 것 그 이상으로 잘 다듬어진 곡들의 연속이다. 타이틀 곡 ‘Dream Note’는 트와이스의 ‘Heart Shaker’, ‘Yes or Yes’를 만든 David Amber의 곡으로 유사한 첫인상을 준다. 그러나 디스토션 잔뜩 걸린 일렉기타와 브라스가 곡의 큰 부분을 차지하며 트와이스와는 또 다른 이미지를 구축한다. 꿈을 노래하는 소녀를 화자로 내세운 가사가 조금 상투적이지만 그리 거슬리지 않게 흘러간다. 〈믹스나인〉 데뷔조였던 박수민이 후렴이나 전면에 나서기보다 브리지의 시작 파트 등을 도맡으며 감초 역할을 한다는 점은 조금 의외로 여겨진다. 인트로의 플럭 사운드가 매력적인 4번 트랙 ‘Fresh! Fresh!’를 추천한다.
미묘: 늘 자극적인 콘셉트를 보여주던 식스밤이 발라드를 내놓았다. 전혀 그런 편곡은 아님에도, 림 샷과 하이햇이 쪼개지는 세기말 R&B 발라드의 향취가 자연스레 연상된다. 아니나 다를까 O.P.P.A 007의 98년작의 리메이크라고. 그래도 워낙에 정통파 발라드라서 그런지 딱히 낡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멤버들의 파트 분배도 곡의 감정선을 자연스럽게 끌고 나가면서 각자의 음색을 선보이기 좋게 잘 이뤄진 편. 기우인지 모르겠으나 ‘반전미’를 노리는 발라드라는 선택 자체가 매우 참신하기는 어렵기 때문에, 결국 식스밤의 전작들과의 갭이 신경 쓰이기는 한다. (이미 음악 스타일을 통한 식스밤의 ‘변신’은 몇 차례 있었던 터이다.) 물론 그런 정통적인 디스코그래피의 관념과 거리가 있는 모델이기에 큰 흠이 되지는 않기도 하겠지만.
심댱: 쉬이 쓰이지 않는 소재로 곡을 쓰면서도 그만의 냄새가 담뿍 담긴 “월간 윤종신”에서 유주의 새로운 모습을 보았다. 단단하고 뽀얗게 정제된 톤 대신 불쑥 찾아온 이별에 흔들리는 그라니. 정말로 생각해보지 못한 캐릭터다. 성숙하면서도 현실적인 톤의 노래는 그가 그룹에서 보여줬던 서글플 정도로 강단 있는 소녀 이미지와 어우러져 깊은 인상을 남긴다. 사랑을 시험에 비유해 ‘멋진 이별로 우수한 연인이 되자’는 내용은 시의성을 노린 게 분명해 보이지만, 유주의 목소리가 가요에도 썩 잘 어울린다는 사실에 의의를 두고 싶다.
미묘: 비극적인 정조와 라틴팝을 가미한 곡. “뚜루루루” 하는 리프레인을 비롯해, 최근의 경향을 많이 살피고 있음을 여러 곳에서 느낄 수 있다. 새 멤버들이 보강되었는데, 개중 가장 눈에 띄는 건 효선. 당연히 비주얼이 그러한데, 그만큼 새롭게 들리지는 않지만 래핑도 정확하게 제 역할을 하는 멤버. 다만 갖고 있는 것과 가져온 것들 사이에서 내실을 기한 작품이라 평하기는 어렵다. 유행하는 것들을 따라간다는 스탠스가 너무 확연하게 보이는 데다가, 곡에 담긴 멤버들의 보컬이 얕고 불안정한 대목들이 자주 들린다. 글쎄, 가볍게 방방 뜨는 ‘과즙’류의 곡이었다면 그러려니 했을지도 모르겠지만, 곡의 콘셉트 자체가 무겁고 페미닌한 방향이다 보니 더 신경 쓰이는 듯하다. 몇몇 순간 꽤 귀에 잘 감기는 훅을 제시하고 있어서 다른 약점들이 더 아쉽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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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replies on “1st Listen : 2018년 11월 초순”
조성민님 너무 트와이스에만 편향적이신것 같습니다. 매 앨범마다 바라보시는 방향이 다르신것같아요.
엑소 ㅠㅠㅠㅠ 사랑합니다 ㅠㅠㅠ 퓨ㅠㅠㅠ
수동적인 것도 사람의 일면 아닌가… 왜 그게 저절로 곡에 나쁨을 부여하는건지ㅠㅋㅋ 요즘보면 가요웹진보다는 특정 이슈 웹진이라는 느낌이 드네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