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돌로지 필진 단평. 마마무(선공개), 러블리즈, 미스터미스터, 에이핑크, 양다일&웬디, 틴탑, 플래쉬, 바바, 골든차일드, 경리, 홀랜드, 타겟, 코쿤, 트와이스, 마이틴, AZM, 구구단 세미나, 총 17매를 다룬다.
유제상: 리뷰 시점에 발매된 “Red Moon”을 통해 더욱 분명해졌듯이, ‘장마’는 마마무의 음악적 지향점이 팝을 정조준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물론 ‘장마’ 쪽이 좀 더 가요의 분위기를 내포하고 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R&B에 힙합 비트가 뒤섞인 통속적인 곡이지만 만듦새는 깔끔하고, 이제 노래든 랩이든 멤버들이 뭐든지 할 수 있음을 자연스럽게 보여준다. 바로 뒤를 이을 앨범에 대한 기대감을 증대시키는 본연의 역할에 충실한 디지털 싱글이다.
미묘: 러블리즈의 활동곡들에서 종종 ‘폭발력’의 추구를 느끼곤 하는데, 그것이 성공적일 때도 있지만 왜인지 기대만큼의 효과를 거두지 못한 경우도 있었다. ‘여름 한 조각’을 듣고 있으면, 혹시 ‘Ah-Choo’가 이례적이었을 뿐, 원래 그것은 러블리즈의 것이 아니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여름에 쉽사리 트렌디하게 소비될 법한 (≒트로피컬) 요소들을 취하되 시카고 하우스 풍의 피아노를 강조하여 역동감과 단정함을 함께 취했다. 멜로디도 조금은 단순하고 반복적이지만, 경쾌한 비트 위에서 담백하게 흐르는 점이 제법 느낌이 좋다. 피아노와 멜로디 모두 마음만 먹으면 무한히 반복할 수 있는 타입이라 그런지, 애쓰지 않는 예쁜 휴가의 스냅샷 같으면서도 또한 여름날이 언제까지나 계속될 것만 같은 기분을 선사한다. 러블리즈가 의외의 곳에서 썩 매력적인 면을 보여주고 있다는 의미로 Discovery를 붙여 본다.
유제상: 러블리즈의 기존 기조를 유지한 채 제시되는 시즌 송. 최근에 발표한 노래 중에서 가장 윤상 분위기가 많이 나지만 이제 그딴 건 아무래도 상관없어... 리믹서들이 선호할 음원이 아닐까 싶었지만 놀랍게도 디지털 싱글에는 ‘여름 한 조각’ 단 한 트랙만 있었다. 어찌 되었든 이제 러블리즈가 안정세구나 하는 것을 확연히 보여주는 싱글로, 특히 후렴의 간주가 주는 청량감은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을 정도다. 팬이 아닌 분들에게도 추천한다.
마노: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고 하나, 참고만 한 것과 그대로 베껴 쓰는 것 사이에는 크나큰 차이가 존재한다. 안타깝게도 이 곡은 후자에 가깝다. 우연히 겹친 것일 가능성도 없지 않다. 그러나 일부 멜로디와 랩 파트가 심하게 유사하다는 점이 영 석연치 않다. 레퍼런스도 오마주도 아닌 속칭 ‘우라까이’를 좋게 평가해야 할 하등의 이유가 있을 리 없다. 아니, 평가의 가치조차 없다.
랜디: 이제까지 에이핑크가 ‘Luv’ 등 ‘청순 발랄’을 벗어난 노래로 활동한 적이 없진 않았으나, 이만큼 온도가 현저히 낮아진 곡을 부른 일은 없었다. 흔한 트로피컬 EDM이지만, 늘 사랑의 상승적 감성을 노래해오던 에이핑크가 권태로운 가사로 부르니 그 충돌에서 색다른 맛이 난다. 정은지의 보컬에는 늘어지는 90년대 발라드 감성이 있어서 트렌디한 장르임에도 곡을 은근히 통속적으로 소화해낸다. (블랙아이드필승이나 전군의 이전 곡들을 생각해보면 사뭇 재미있는 결과물.) 무대에서는 ‘청순 걸그룹은 실력보다는 외모 아니냐’는 편견에 갇히지 않고 늘 퍼포머로서 단련해온 이들의 연륜이 유감없이 발휘된다. 활동을 거듭하며 손나은의 “Do you love me?” 브레이크 퍼포먼스에 배리에이션이 이뤄지는 것을 보면 이것이 더욱 확실해진다. 이 시대의 아이돌은 곡 단위로만 셀링하는 것이 아니라 유기적인 서사를 선보이는 존재이기에, ‘콘셉트의 전환’이라는 것은 꽤 중요한 포인트가 된다. 에이핑크는 아직도 그 분위기의 낙차를 이용할 수 있을 정도로 철옹성 같은 기존 이미지를 가진 그룹이었다 볼 수 있겠다. 진보적인 사운드를 내세우는 팀은 아니지만, 분명 이런 변화의 모먼트에서 목격하는 즐거움이 있다.
미묘: 과감한 변신에 우선 박수를 보낸다. 하지만 그 결과에 전적으로 동의하기는 어렵다. ‘1도 없어’는 신스팝에서 가져온 에스닉한 프레이즈들이 시의적절한 이펙트들과 함께 흐르고, 후렴은 타이틀곡이 가져야 할 흡인력과 역동성을 갖고 있는데, 보컬과의 조합이 썩 좋지만은 않다. 에이핑크 멤버들은 각자의 매력과 실력을 두루 보여주지만, 아무래도 너무 상냥하다. 디스코 베이스로 5도권을 오가는 서글픈 멜로디를 정제된 목소리로 부르면서 씁쓸한 정조는 아슬아슬하게 청승에 걸치고 만다. 음악방송 무대 버전이 더 설득력 있는 것은 이들이 라이브의 강자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음반보다는 아무래도 거칠기 때문인 듯하다. 아무리 아이돌은 영상에서 완성된다지만 크게 아쉬운 일이다. 화사함을 힘있게 표현한 ‘A L R I G H T’나 침착한 고혹을 담은 ‘Don’t be silly’도 각기 매력적인 트랙들이지만 비슷한 불균형을 보인다. 개중 가장 안정적인 개량형은 ‘I Like That Kiss’인 듯한데, 이는 ‘상큼’ 함량이 높아서가 아니라 도시적인 어른스러움을 갖춘 채 화려하고 자신 있게 공간을 휘어잡아 주기 때문이다. 아마도 답은 나와 있다고 본다.
심댱: 어쩌면 전부터 해야 했을 이미지 변신을 급하게 한 느낌의 ‘1도 없어’다. 그 변신은 왠지 핑클의 ‘Now’ 정도의 충격과 비슷하다. 청순 콘셉트의 도돌이표 대신 트로피컬에 ‘다 죽여 필터’를 씌워 놓으니 오하영, 김남주 등 몇몇 멤버가 살아나는데, 너무 늦지 않아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럼에도 몇몇 수록곡은 그들의 주전공인 청순을 놓지 않고 있다. 개인적으로 평소 에이핑크가 전달하는 온기가 따뜻하다 못해 덥다고 느껴졌는데, 이전보다 산뜻한 모양새를 취해 여름에 맞는 톤으로 살짝 틀어 놓은 것 같다. 에이핑크의 분홍빛 여름이 잘 이식된 ‘I Like That Kiss’와 정은지 보컬의 우아한 그루브가 돋보이는 ‘Don't be silly’를 추천한다.
유제상: 곡 스타일이 굳이 말하자면 과거의 f(x)처럼 변했는데 결과적으로 보자면 긍정적인 효과를 낸 것 같다. 타이틀 ‘1도 없어’는 세련됨을 추구했지만 크게 경망스럽지 않고, 무엇보다도 그룹의 오리지널리티가 살아나 이제 어디서 들어봄직한 기분은 없다. 요상한 곡명은 여전히 불만이지만 예전 느낌이 1도 없다는데 뭐... 이들의 변화된 분위기를 더욱 만끽하고 싶다면 두 번째 트랙 ‘A L R I G H T’도 연이어 들어볼 것을 권한다. 평자랑 취향이 딱 맞지 않아 오바하며 추천하지 않았을 뿐, 이 앨범은 정말 잘 만들어져 있다.
조성민: 에이핑크의 지향점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21세기 S.E.S.(물론 S.E.S.도 21세기 초반까지 활동했다)’에 있다고 생각해왔는데, 이번 앨범의 지향점 또한 정확히 그에 맞춰져있다. 다만 에이핑크가 S.E.S.보다 좀 더 현시대적이면서 동시에 전통적인 가요의 색깔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순전히 멤버들, 특히 정은지의 음색이 철저히 현실의 어른 여자의 색채를 띠기 때문이다. 이것은 가상의 신적인 존재로 상정된 이미지를 표현했던 S.E.S.와는 확연한 차이점이다. 파워풀한 힙합 스텝을 밟던 S.E.S.와 달리 에이핑크가 ‘1도 없어’에서 좀 더 가벼운 라인의 댄스를 채택한 것 또한 21세기를 살아가는 S.E.S.가 했을 법한 고민이 녹아있는 지점. 성장한 아이돌이 스스로의 방향성을 결정하기 시작한 단계에서 ‘성숙’을 키워드로 삼는 것이 새삼스러울 일은 아니지만, 그 과정에서 팀 외부의 프로듀서가 취해오던 전략을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차용해오는 것은 꽤 흥미로운 시도.
심댱: 더위가 한풀 꺾인 여름밤을 연상시키는 싱글. 태양광선에 잔뜩 익어버린 귀를 시원하게 식혀주는 어쿠스틱 팝이다. 물소리와 풀벌레 소리, 느긋한 기타가 선사하는 여름 풍경은 두 보컬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게 한다. ‘봄인가 봐’의 여름 버전이라고 생각하면 될까? 모자람도 없고 넘침도 없는 적당한 듀엣곡이다. 이전 곡에서도 느꼈지만, 웬디는 듀엣에서도 자기 역량을 잘 펼치는 보컬이다. 약간 서늘한 곡의 분위기를 부드럽게 풀어내는 웬디의 보컬은 선선한 바람 안에서 약간의 온기를 머금게 한다. 뮤직비디오도 좋지만, 눈을 빛내며 목소리를 얹는 웬디가 보고 싶다면 라이브 클립을 참조하길 바란다.
미묘: 여름 리패키지로 어깨에서 힘을 좀 뺀 두 곡이다. ‘너와 나의 사이’는 트로피컬 하우스인 척하다가 훨씬 가요적인 방향으로 돌아서는데, 느긋한 흐름 끝에 선언적인 리프레인(“너와 나의 사인 love”)에만 지긋이 힘을 주는 전략이 재미있다. 그러나 후렴에서의 리듬감과 ‘가요 필’을 보완하는 수단이 너무 틴탑의 데뷔 시절 유행처럼 들려서, 편안함이 루즈함으로 다가오고 만다. 다음 곡인 ‘Take my hand’에서도 비슷한 전략과 비슷한 가능성을 발견하지만, 안타깝게도 두 곡 모두 결국 음악적 어휘력의 빈한함에 가로막힌다. 다음 트랙부터 이어지는 전작의 기세를 생각하면 긴 인트로처럼 여겨지기도 하는데, 그 자체로 나쁘진 않지만 리패키지란 게 그런 게 또 아니지 않은가.
마노: 흥겨운 업템포 비트의 곡 자체는 크게 나쁠 것이 없다. 문제는 가사다. 고리타분한 은유 하며, 쓸데없는 동어반복 하며, 지나치게 애교를 남발하는 유아 퇴행적 텍스트에 그만 실소가 터지고 말았다. 연차가 꽤 쌓인 걸그룹인데, 지금까지의 활동을 통해 무엇을 지향하는지 방향성이나 목표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점도 치명적인 문제다. 모질게 말해, 팀의 미래가 기대되지 않는다.
미묘: 이유를 딱 꼬집어 말하기 어렵지만 플래쉬는 개인적으로 성장을 지켜보고 싶어지는 그룹 중 하나다. ‘베이비로션’은 그간의 곡들 중 만듦새에 있어서는 가장 탄탄한 듯하다. 당분 과다로 몰아치는 곡이지만 멜로디가 선명하게 맺고 끊는 편이라 청자가 길을 잃지는 않게 해준다. ‘난 누구?’에는 답해주지 않지만 ‘여긴 어디?’라는 불안은 별로 없다. 툭 자르고 들어오는 랩도 분위기를 확실하게 뒤집어서 곡의 산만한 맛을 더해주는데, 그 수행이 불안정하고 무성의했다면 거두지 못했을 효과다. 시장에서의 위치에 따른 기대를 상회하는 랩. 다만 호들갑스러운 애정표현이나 ‘아무튼 애교’, 유아적 코드와 의성어/의태어 등의 정서적 부분이 낡았다는 것은 뼈아픈 약점이다. 이제는 그런 것들이 이미, ‘너무 낡았지만 지하돌들이 촌스럽게 복제하고 있는 어떤 것’으로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은 대중적으로 인식되는 어떤 걸그룹의 전형에 부합한다는 의미이기도 해서 ‘수요’가 있으리라는 생각은 든다. 이를테면 유흥가나 관광지의 매장 음악을 통해 스쳐 지나갈 때 개중 ‘완성도가 낮은’ 곡으로 여겨지지는 않을 듯하다.
심댱: ‘청순’을 영혼까지 끌어올린 재킷을 보고 그저 넘기려고 했는데 의외로 멀쩡한 아이돌 팝이었다. 아이돌의 하한선을 정확히 지켜낸 뮤직비디오와 곡에 놀람을 금치 못한다. 무난한 멜로디와 곡을 적당히 소화하는 보컬, 어느 것도 걸림 없는 믹싱까지. 나쁘지 않은 아이돌 팝이라 불리기에 손색없다. 화사한 청순함은 여자 아이돌이라면 능히 할 수 있는 콘셉트라 너무 뻔하지만, 저예산 그룹에서 이 정도의 퀄리티가 나온 것이라면 정말 잘 해냈다는 생각이 든다. 이전작 ‘Funky Music’부터 들을 만하다는 인상이 생기는데, 이대로 끝낼 수 없다는 제작자와 아티스트의 심기일전이 돋보여 Discovery! 를 남긴다.
마노: 타이틀곡 ‘Let Me’는 여러모로 데뷔곡 ‘담다디’를 떠올리게 한다. 푸르른 초원 위를 힘차게 뛰어다니는 소년들의 해사한 활기가 로킹한 사운드와 맞물려 팡팡 터지는 느낌이 특히 그러하다. 세간에서 흔히 ‘청량함’이라 일컫는 소년들의 햇살 같은 활기를 곡과 뮤직비디오 화면 가득 담아냈는데, 굳이 차이라고 한다면 브라스 같은 어쿠스틱 악기의 활용이 돋보였던 ‘담다디’와는 달리 전자음을 전면에 배치했다는 것 정도일까. 골든차일드가 가장 잘하는 것이면서 이 씬에서 가지는 변별점은 활기찬 ‘소년미’라 생각하는데, 그런 점에서 분명 반가운 싱글이기는 하다. 꼭 필요하다면, 팀이 가장 잘하는 것을 확실히 다져나가는 선에서 적절한 변화를 도모하길 바란다.
미묘: 상쾌하고 착한 팝송들이다. 무드는 유쾌하고 낙천적이며, 사운드는 힘있게 공간을 지배하는 가운데 구석구석의 디테일도 좋다. 리듬 체인지나 구조적 요소, 합창 등을 활용해 듣는 이의 호흡을 자연스럽게 끌어올리는 솜씨도 매우 안정적이다. 세 곡이 담긴 싱글이 루즈해질 틈 없이 컴팩트한 점 또한 좋다. 다이내믹한 기세가 좋은 ‘Let Me’ 이외에도 멜로디의 아기자기함이 돋보이는 ‘If’도 추천할 만하다. 스트레이트하게 흘러가는 듯하다가 후렴 후반에서 화성 진행의 방향과 조성이 성큼 바뀌면서 이뤄지는 상승감이 상당히 맛깔스럽다.
조성민: 팬덤의 이름이 정해지고 그 이름을 딴 작품이란 결국 일종의 헌정 음반일 텐데, 아직까진 팬들에게 대단한 것을 헌정할 만큼 준비되지 않았다는 인상만이 전해진다. 신인의 풋풋함으로 해석할 수 있는 것도 슬슬 한계에 부딪힐 단계 아닐지. 드라마를 만들고 싶어 하는 곡에 비해 보컬은 밋밋하고, 랩은 포인트를 만들지 못하며, 안무 또한 ‘담다디’ 만큼의 파괴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멤버들의 능력이나 경력이 부족하다기보단, 그룹 성장의 청사진이 미비한 듯하다.
마노: 세상이 자꾸만 잊는 것 같아서 굳이 밝혀두건대, 경리는 가수다. 그것도 노래를 상당히 잘하는. “그저 넌 내 말 듣기나 해”라는 선언에 가까운 가사처럼, 미니멀하면서 매끈하게 빠진 곡과 퍼포먼스는 온몸으로 경리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라 외친다. 까랑한 톤의 보컬과 차가운 무드의 사운드가 잘 어우러져 있고, 흥미로운 요소가 많아 오디오로만 들어도 심심하지 않다. 하이힐과 하네스로 무장한 남성 백댄서들 사이에서 무대를 호령하는 경리의 뛰어난 퍼포먼스는 덤이다.
유제상: ‘나인뮤지스를 만들어낸 인프라로 어느 정도 수준의 곡까지 만들어낼 수 있을까?’란 질문에 대한 가장 수준 높은 대답. 비트에 대한 기교는 부릴 수 있을 만큼 최대한 부렸지만 잡스럽지 않고, 후렴부로 넘어가는 와중에 짧은 침묵 이후 “어젯밤 / 내 얘길 들어볼래?” 부분이 주는 짜릿함은 근래 가요에서는 발견하기 어려운 무엇이다. 이 정도 힘을 가진 곡이라면 굳이 섹시 타령하며 홍보를 하지 않아도 되지 않았냐는 생각이 들 정도. 제작진이 경리를 얼마나 아끼는지 알 수 있는 훌륭한 결과물이다. Pick!을 줄 수밖에.
조성민: 하이힐을 신은 남자 댄서들과 함께 보깅 댄스를 선보인 경리의 ‘어젯밤’은, 나인뮤지스의 전성기를 기억하는 이들이 갖고 있던 ‘나인뮤지스에서 솔로 음반이 나온다면 어떠해야 한다’는 기대를 충족할 만하다. 관능적인 비주얼로 주도적인 연애상을 노래하는 것 또한 나인뮤지스가 가장 잘했던 분야 아니던가. 경리가 나인뮤지스의 키 플레이어였다는 사실을 상기하게 하는 싱글이다.
마노: 보컬은 지나치게 밋밋하고 뻣뻣하며, 단조롭게 흘러가다가 ‘벌써 끝?’이라고 생각하게 하곤 ‘아닌데?'라고 약 올리듯 다시 이어지는 곡 구조는 당황스럽다.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들려주고자 하는 메시지가 무엇인지가 곧고 명확한 것은 정말로 큰 장점이지만, 그것을 받치는 요소들이 이렇게 허술해서야 그조차 뜬구름 잡기에 불과할 뿐이다.
미묘: 의도가 좋지만 프로덕션은 좀 허술했던 전작에 이어, 이번에는 낯선이 프로듀서로 가담했다. 여러모로 마돈나의 ‘What It Feels Like For A Girl’(또는 그것의 Oakenfold Remix)을 연상시키는데, 부글거리며 화려하게 터지는 신스가 곡을 주도한다. 불안을 내포한 낙관이라는 단단한 심경이 근사하게 어우러진다. 브리지에서 비트가 빠지고 보컬이 스택으로 이어지는 순간도 꽤 짜릿함을 준다. 다만 이런 짜릿함이 홀랜드의 행보와 ‘내용’에 의한 감상과 무관하게 이뤄진다고 보긴 조금 어려운데, 아무래도 보컬의 숙련도에 아쉬움이 남는다. 그럼에도 홀랜드의 나른한 보컬 톤이 기분 좋은 대조를 이루며 기능할 수 있는 솔루션이 이 곡에 있음은 분명하다.
마노: 신인에게 있어서 어느 정도의 ‘어그로’는 화제성이나 변별력을 위해서 이용할 가치가 있는 요소긴 하다. 그러나 그것도 정도의 문제다. 한껏 비애를 품은 진지한 곡 분위기와 완전히 겉도는 유행어의 남발은 어그로가 아니라, 팀의 매력마저 깎아 먹고 마는 치명적인 마이너스 요소가 될 뿐이다. 마치 ‘엄근진’한 표정으로 개그를 시도했다가 그만 ‘갑분싸’가 되어버린 것 같은 모양새. 곡 자체는 상당히 잘 만들어진 팝인데, 그야말로 '다 된 곡에 유행어 뿌리기'로 모든 것을 망쳐버렸다. 행하는 아티스트는 대체 무슨 죄란 말인가.
미묘: 가사의 유행어 사용에 관대한 편이라고 생각하지만 “실화냐”는 좋지 못한 사례다. “실화냐”라는 말을 사용하는 사람들과 상황이 애잔한 곡의 주제와 너무나 불화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생경한 효과를 낼 수 있었을지 모르겠지만, 발음과 멜로디의 조합, 디렉팅이 (모질게 말하기 괴롭지만) 비호감으로 들리기도 한다. 편곡 자체가 썩 나쁘지만은 않은데, 멜로디의 감성은 다소 낡은 느낌이 있는 가운데, 현실 세계에서 유행어를 가장 부적절하게 사용하는 사람들이 아저씨들임을 생각해야 하지 않았을까.
유제상: 평소에 제목이나 팀명에 대해 딴지를 건다고 지적을 많이 받는 편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템포 느린 유행어의 곡명 사용은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겠다. ‘실화냐’는 가사에서 “실화냐”라는 말을 수도 없이 하는데, 여러분의 직업이 평소에 20대 여성을 수십 명씩 그것도 10여 년 동안 가르치는 어떤 것이라면 이런 곡명에 결코 너그러울 수 없을 것이라고 평자는 확언한다. 곡은 랩을 앞세운 YG 엔터테인먼트 계열 노래와 흡사하지만, 랩을 끊는 지점이 묘하게 예스러워 트렌드에 뒤처졌다는 느낌을 준다. 전체적으로 타성에 젖은 구성이 아쉽다.
미묘: 참 이렇게 꽉꽉 채우기도 쉽지 않았겠다.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자극을 한 박자의 양보도 없이 가득 채운 것이 이 곡의 거의 모든 섹션이다. 훅만이 예외라면 예외인데, 반주는 여전히 물러설 기색 없이 과하게 채워져 있지만 정작 “뭐라고”, “사랑한 적 없다고 what”이라는 이 단 두 프레이즈에서 임팩트가 빠져 있다. 과잉의 미학이라는 케이팝에서조차도, 역시 중요한 건 ‘선택과 집중’이라는 평범한 진리를 되새기게 된다.
유제상: 보도자료를 보니 요시모토 엔터테인먼트와의 합작 ‘개그’ 아이돌이라는데, 곡만으로는 그런 점을 알 수 없었으며 오히려 상당한 진지함이 느껴졌다. 다만 프로듀서의 성향상 한 세대 전의 아이돌이 떠오르는 멜로디 메이킹이 다소 예스러워 보이긴 했다. 일본 쪽의 취향이 반영된 것인지 곡의 템포가 성급하고, 후렴부에 나오는 드롭은 가바에 가까운 흉포함이 있다. 이게 동시대의 다른 곡들과 확연한 차이를 보이긴 하지만 시장의 반응을 이끌어낼 만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글쎄... 곡 외적으로 (본연의 콘셉트대로) 어딘가에 나와 평자를 웃겨줄 수 있다면 지금의 평가가 좀 더 긍정적으로 바뀔 수도 있겠다.
랜디: 제목에는 밤을 말하고 있지만 밤보다는 뜨거운 태양이 어울릴 업템포 곡. 딜레이를 건 금관이 ‘뿌뿌’ 하고 울리는 사운드에 장난끼가 가득하다. 함께하는 보컬은 이렇게 예쁘게 보다는 조금만 더 와일드하게 부르면 좋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도 있다. 무대를 보면 이 아쉬움이 조금 사라진다. 후렴의 댄스브레이크에서 안무로 뿜어내는 에너지가 볼 만하기 때문. 뜨거운 모래사장에서 맨발로 뛰노는 듯한 현란한 발동작 안무엔 과거 원더걸스가 ‘Like This’ 등으로 선보인 스포티함이 있다. 드디어 ‘아직 사랑을 모르는 소녀’에서 벗어난 가사관은 트와이스의 세계로 한정해서는 큰 지각 변동일 수 있겠으나, 여타의 여성 가수들은 이미 진즉에 걸어가고 있던 진보라서 크게 감동하기엔 머쓱한 감이 있다. 일단은 시즌송이니까 깊이 생각하지 않고 신나게 즐기고 싶다.
심댱: 뭘 해도 되는 그룹이라 그런지 흥겨운 여름 파티 분위기를 손쉽게 선점해버린 트와이스다. 자유롭게 흔드는 팔다리처럼 자유분방한 분위기에 사랑(!)과는 동떨어진 타이틀을 부르는 경우가 처음 아닌가? 뮤직비디오는 그들을 모델로 한 모 이온 음료 광고를 보는 것마냥 트와이스의 맑은 이미지를 잘 드러냈다. ‘Chillax’를 비롯한 신곡의 존재감이 크다. 파도처럼 넘실대는 분위기에 나연의 하이노트가 빛나는 트랙인 ‘Chillax’를 추천하면서 올해의 여름의 분위기는 트와이스가 키를 쥐고 있다고 공언해도 되지 않을까 싶다.
유제상: 타이틀 ‘Dance The Night Away’는 외국인 작곡가의 참여로 인해 박진영이 만든 ‘What is Love?’ 이전의 분위기로 회귀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이제 무엇을 들려주어도 최악이라 생각하는 휘성 작사를 곡에 끼얹었기 때문에 기존의 옹알이들과는 또 다른 진부한 무언가로 귀착되고 말았다. 전체적으로 주술적인 느낌이 강한 곡인데, 이제 이쯤 되면 타이틀도 뭣도 아니고 그냥 트와이스 멤버들이 뛰어놀 판을 만들어주는 엘리베이터 뮤직에 불과하지 않나 싶을 정도. 수록곡 또한 기존 트와이스 EP의 전통을 따라 하나 같이 귀에 안 들어오는 것투성이다. 모모랜드 앨범에 Pick!을 준 사람으로서 할 이야긴 아니지만, “Summer Nights”가 음감용 EP가 아님은 분명하다고 말하고 싶다.
유제상: 일곱 곡이 수록된 마이틴의 빵빵한 EP. 샤이니를 연상시키는 애시드한 타이틀 ‘She Bad’가 기대 이상으로 흥겹다. 고조시키는 비트나 가성으로 흥얼거리는 후렴구가 기시감을 주지만, 이 정도면 팀의 커리어 전반과 비교했을 때 상당히 높은 성취라 하겠다. 흥행에 성공한 선배들의 초창기를 연상시키는 ‘Martian’이나 ‘Pretty in Pink’ 등의 곡을 들으면 이 EP가 얼마나 공들여 만들어진 결과물인지 알 수 있다. Discovery!는 이런 EP에게 주라고 있는 것이겠지.
마노: 바닷바람의 상쾌함을 가득 품은, 신스를 얹은 트로피컬한 사운드가 귀에 들어온다. 이제는 트로피컬 바이브가 많이 사용되다 못해 상당히 남용되고 있지 않나 싶기까지 한데, 그럼에도 식상하거나 싫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전반적으로 각 요소들이 서로 밀착되지 못하고 어딘가 삐걱대는 인상이었던 전작과는 달리, 멤버들의 안정적인 수행력과 산뜻한 사운드가 착 맞아떨어지는 느낌이 꽤 좋다. 무더운 여름을 한풀 식혀줄 만한 괜찮은 서머송이면서, 팀의 앞으로를 기대하게 하는 싱글.
유제상: 올해 3월에 데뷔 싱글을 발표한 바 있는 AZM의 디지털 싱글. ‘Our Story’는 트렌드를 따라가려 노력한 청량한 하우스 비트의 곡이다만, 보컬은 다소 조악하고 가사는 의미 없는 말들의 연속이다. 결국 이런 곡은 멤버들의 춤사위에 분위기가 좌우되기 쉬운데, 아쉽게도 이쪽 또한 그다지 인상적이지 못했다. 다른 곡에서 오려 붙인 듯한 랩만 다듬었어도 지금의 결과물보다는 한결 나으련만.
마노: 〈프로듀스 101〉 시즌 1 초반부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기울여 봤다면, 당시 세정과 미나, 나영 세 멤버가 기획사별 평가 무대에서 니키 야노프스키의 ‘Something New’를 선보여 놀라움을 자아낸 장면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이번 구구단의 유닛 활동은 그 무대의 복각판이면서 동시에 케이팝 번역판이다. 혹자는 소녀시대 태티서와의 유사성을 지적할 수도 있겠으나, 한껏 ‘어른미’와 ‘탈-케이함’을 어필했던 태티서와는 달리 구구단 세미나는 상대적으로 좀 더 상큼하고 풋풋하면서 ‘케이스러움’을 내세운다는 점에서 궤를 달리한다. 브라스, 베이스, 드럼 등의 어쿠스틱 악기를 적극적으로 배치한 훵키한 사운드에, 풍성하고 소울풀한 보컬과 이따금씩 분위기를 환기하며 톡톡 쏘는 미나의 래핑이, 마치 다양한 재료를 차곡차곡 쌓은 파르페처럼 조화롭게 어우러져 있다. 본체 활동 당시에는 보일 기회가 주어지지 못했던 ‘가창력’을 유감없이 발휘하는 모습에서, 유닛 활동의 진정한 의의란 무엇인지를 다시금 확인한다. 소울풀한 무드에 흥겨운 리듬과 중독성 있는 훅이 인상적인 ‘Ruby Heart’도 놓치지 않길.
미묘: 간만에 듣는 레트로 사운드가 마냥 들썩이면서 유쾌한 분위기를 시종일관 유지한다. ‘샘이나’는 가창력을 드러내기 좋은 섹션도 포함돼 있고 그것이 때로 아슬아슬하게 더위를 느끼게 하기도 한다. 그러나 곡 전반의 상쾌한 음색이 기본색으로 깔려 있어서 브라스 중심의 뜨거운 사운드가 화려한 맛을 맘껏 뽐낼 수 있다. 수시로 분위기 전환이 이뤄지며 그게 제법 격하다는 점도 재미있는데, 특히 가장 이질적이면서도 쿨하게 짚고 넘어가는 랩 파트가 매우 즐겁다. 캐릭터일 뿐인 듯하던 미나의 조금은 맹한 래핑이 드디어 멋있게 들리기 시작한다. 뮤직비디오 속, 구구단 특유의 키치와 초현실주의로 담아낸 여름휴가의 스냅샷들도 꽤 재미있다.
유제상: 모든 것이 엇나가 있다. 해괴한 유닛명도, 구성원의 조합도, 마마무를 연상시키는 타이틀 곡 ‘샘이나’도. 예상컨대 구구단의 배후에는 세정의 보컬적 역량을 훵키한 사운드로 풀어내고픈 이가 있는 듯한데, ‘The Boots’가 별 호응을 못 얻었다면 그 점은 재고함이 옳다. 단언컨대 우주미키가 평자를 실망시켰다면, 구구단 세미나는 평자를 경악게 했다. 이건 어떤 구석으로도 좋은 평가를 내릴 수 없는 결과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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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replies on “1st Listen : 2018년 7월 초순”
아 전 트와이스 이번 음악 너무 좋게 들었는데 어째 평가가 박하네요 ㅠ
휘성 팬으로서 유제상님 평론에 좀 빡치네요. 안좋으면 어떻게 안좋다 어디가 안좋다 언급을 해주셔야지 개인적으로 최악이라 생각한다, 끼얹다 이딴식으로 표현하는건 안티랑 뭐가 다릅니까
보고 기분 드러워서 댓글남길라고 디스커스 가입까지 했네요. 비난 말고 비판을 좀 해주시죠
저도 어떤 면이 최악이라고 생각하는지 궁금해지는 한 줄이었어요. 꾸준히 아이돌로지 1st listen 읽고 있는데 다른 필진들 평은 저와 의견이 달라도 ‘아 그럴 수 있겠구나’ 납득하고 넘어가는데 유제상님 평은 생각이 다른 사람을 불쾌하게 만들기만하고 납득이 안된달까..
구구단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걸스힙합? 일본 케이콘에서 방탄 커버한 건 좋게 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