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21일~31일에 발매된 아이돌 언저리 신작들에 대한 필진 단평. 전설, 유키스, 원펀치, 리지, 나인뮤지스, 인피니트H, ATO, 써니힐, 에이코어, 태이(미스터미스터)를 들어보았다.
미묘: 이건 또 의외의 곡. 공간계 이펙트와 묵직한 탐탐, 두어 겹의 패드가 장엄한 분위기를 펼쳐놓는 가운데, 비교적 간결한 멜로디가 화성과 예쁘게 부딪히면서 '영광의 80년대' 느낌을 물씬 낸다. 적절히 격정을 섞어 넣은 보컬이 이 곡을 발라드로서 충분히 기능하게 하고, 신스와 드럼 사운드가 비트감을 살려 놓아 비-발라드적인 지향점을 취하며, 그 사이에서, 먼 곳을 바라보는 감성의 작편곡이 양자 모두에 기여한다. 내가 기억하기로는 가요계에서 타이틀곡으로서 흔한 스타일이 아닌 편인데, 굳이 비교를 하자면 팀B의 '기다려' 정도가 아니었을까. 바꿔 말하면 국내에서 그다지 재미 본 적 없는 스타일이란 의미기도 한데, 이런 곡들이 꾸준히 나와줬으면 하는 개인적 바람도 있다.
유제상: 작년 7월 '미.남 (미련이 남아서)'으로 데뷔한 전설의 두 번째 싱글. "헉" 소리가 나올 정도로 가난해 보였던 뮤직비디오의 때깔이 확실히 더 좋아졌고, (사실 이 부분은 비교 우위라고 보는 게 옳겠지만) 노래도 '흔적' 쪽이 더 낫다. 정형화된 남성 아이돌 그룹의 형태를 띠고 있다는 점에 있어서 차별화 전략은 아직 보이지 않는 가운데 멤버들의 '외모'만은 여전히 빛난다. 강의실에 모셔두면 학생들은 칠판이 아니라 이들을 보겠지.
조성민: 록발라드에 최적화되어 있는 듯한 메인보컬의 음색이 곡과 잘 어우러지는 것은 참 좋게 들리는데, 다른 멤버들의 음색이나 창법이 딱히 차별화되지 않아서 곡 내내 큰 다이내믹이 느껴지지 않는 것이 많이 아쉽다. 뮤직비디오 역시, 뭔가 재밌는 게 많이 나올 법도 한데, 몇몇 곳에서 멤버들의 어색한 연기가 드러나 여러 면에서 아직 서툰 신인의 느낌이 가득하다. 그래도 아직은 다음을 기대해도 좋을 신인.
오요: 비운의 아이돌을 꼽으라면 으레 생각나는 유키스의 무려 열 번째 미니앨범이다. 2008년 데뷔한 이래 그룹의 정체성을 찾지 못해 갈팡질팡하는 모습이 참으로 안타깝다. 타이틀곡 '놀이터'는 이제까지 유키스가 선보인 타이틀곡 중 가장 안정적인 진행을 보여주는데, 근래 과잉으로 치닫는 아이돌 가사들과 비교하면 상당히 절제된 가사("툭툭툭 또 툭툭툭 / 내 가슴의 눈물이 툭툭툭 / Just like your 아이스크림이 흘러 뚝뚝뚝")와 곡에서 의도했던 분위기를 효과적으로 극대화하는 후렴의 전자음과 멜로디가 기억에 오래 남을 만하다. 이쯤 되면 빛을 볼 때도 되지 않았나 싶다.
조성민: 아마도 국내의 많은 대중이 유키스를 특유의 '어중간함'으로만 기억하고 있을 듯하다. 그것은 분명, 그동안 한 가지로 일관되지 않았던 음악 색깔과, 뚜렷한 이미지를 각인시킬 만한 음반 외 활동이 부진했던 탓일 것이다. 그러나 단순히 그런 이유로 무시당하기에는, 유키스는 분명히 뛰어난 팀이다. 일단 그렇게 튀진 않더라도 안정되어 있는 보컬이 항상 든든하게 제 역할을 해주고 있고, 랩 역시 동급 아이돌 래퍼들 사이에서 뒤처지는 편은 결코 아니며, 군무는 웬만한 신인 아이돌보다도 정교하고 깔끔하게 잘 짜여져 있다. 손수건을 활용해 가사에 등장하는 청자의 눈물을 닦아주는 듯한 동작은 '덕심'을 자극하기에도 충분해 보인다. 어쿠스틱한 1, 2절 파트가 후렴에서 비트와 오케스트레이션이 추가되면서 다이내믹한 전개로 이어지는 것도 상당히 고무적이다. 비록 국내에서는 다른 보이그룹에 팬덤을 선점당했다고 하나, 해외에서 국내 못지 않은 큰 인기를 끌 수 있었던 이유는 역시 거부감 없이 편하게 들을 수 있는 팝을 기반으로 했다는 점과, 6년 차 아이돌 특유의 여유와 능숙함 때문 아니었을까. 이제는 '어중간함'이라기보단, 차라리 이게 '유키스다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김윤하: 뭔가를 각 잡고 하려 하면 궤도이탈이 나고야 마는 용감한 형제의 2015년 NEW! 이탈. 이 프로젝트의 시작이자 끝은 90년대를 노골적으로 녹여 굳힌 노래들에 ‘그 시절을 살아본 적도 없는’ 14살 멤버와 "Illmatic"과 동갑인 94년생을 끼얹었다는 것이고, 이 어색한 동거는 앨범 곳곳에서 이리 부딪히고 저리 구른다. ‘난 알아요’의 골조를 그대로 가져온 타이틀곡이나 90년대 가요풍의 각종 보코더 효과, 이펙트까지 가져온 정성을 보고 있자니 차라리 에릭 비 앤 라킴이나 스눕독이 아닌 서태지와 아이들이나 아이돌을 외쳤다면 진정성™이나 획득할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특히 ‘제2의 듀스’라는 캐치프레이즈와 이현도는 끼얹지 않는 것이 백배 나았다.
미묘: 'Nightmare'의 중2 스왝은 미울 수도, 귀여울 수도 있겠으나, 용감한형제의 여자 곡을 그대로 가져온 듯한 'Ice Ice'와, 거기에 듀스 같은 것을 끼얹은 '돌려놔'에 오면 이게 "올드스쿨 스왝"과 "클래식"인가 싶어진다. "골든 에라에 태어난" 94년생과 "포틴 베이비"가 "순수했던 그때로 나를 돌려놔"라고 노래하는 것이 이 음반이다. 그 모순의 중심에는 '어린 애들'을 휘둘러 '어른'인 자신만의 로망을 (일부) 실현하고자 하는 프로듀서의 에고트립 욕망이 자리하고 있는 건 아닌지. 이 음반에 만족할 대상은 누구일까. 힙합에 관심은 없지만 듣는 척은 하고 싶은 사람들?
블럭: 1. 'Nightmare'가 욕을 먹는 이유는 꽤 많다. 신발, 반다나, 메이크업, 헤어가 주는 부조화가 시작이고 소품, 세트에서 느낀 '기믹에 대한 환상'은 더욱 심각하게 다가온다. 이는 가사의 내용이나 표현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안무나 가사를 통해 과거를 기억하겠다는 의사와는 달리 현재의 힙합 기믹에 가까운 부분이 등장한다. 따뜻한 질감에 '우리가 악몽이 될 거야'라고 귀엽게 말하는 것보다 그냥 한국의 90년대를 정체성으로 가져오는 것이 훨씬 좋았을 것이다. 쓸데없는 자부심이나 근본적인 부분을 논하고자 하는 게 아니라, 힙합이 '이용될 수 있는' 최대치처럼 보인다. 이 곡은 나중에 "아이돌 코드"에서 따로 풀겠다.
2. '돌려놔'는 좀 더 듀스에 가까운 포맷을 선보이고 있다. 용감한형제는 애프터스쿨의 '첫사랑' 전후로 올드스쿨 스타일, 특히 샘플 사용에 있어서는 이미 좋은 감각을 선보인 바 있다. 그래서 '돌려놔'와 'Ice Ice'는 장점이 있는 트랙이다. 다만 후렴구에서 선보이는 힘이 적어서 늘어진다는 느낌이 있다. 'Ice Ice'는 구성으로 그러한 부분을 커버하려는 흔적이 보이는데, 아직 곡 하나를 끌고 가기에는 몰입도나 긴장감을 만드는 능력이 부족하다. 물론 이 두 곡은 'Nightmare'와는 전혀 다른 맥락을 가지고 있다.
3. 진정성이나 정체성을 강조하기 위해 이런저런 장치들을 마련했지만, 그게 바로 다가오기는커녕 거리감이 느껴진다. 몇 번이고 강조하지만, 진정성이나 정체성은 호소하고 피력하는 것이 아니라 보여주고 증명하는 것이다.
오요: 첫 트랙 'Nightmare'의 경우 레퍼런스가 너무 노골적이어서 차라리 괜찮다고 본다. 올드스쿨을 대표하는 이름을 주워섬기는 'name drop'도 귀엽다면 귀엽다고 할 수 있다. 근데 '돌려놔'에 이르러 왜 하필이면 듀스인지 모르겠다. 듀스를 추억하는 사람들이 많다고는 하나 듀스의 음악은 듀스가 했기 때문에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김성재의 죽음을 통해 듀스가 획득한 서사 또한 분명 있다.) 하다못해 이런 〈토토가〉류의 기획이 먹히는 세대와 아이돌 힙합그룹으로서 원펀치가 지향해야 하는 팬층은 완전히 다르다. (방탄소년단이 새로운 초통령으로 등극하고 있는 작금이다.) 다른 걸 다 떠나서, 조이 배드애스(Joey Bada$$)의 경우와 비교하기엔 일단 프로듀서 용감한형제의 벽이 너무 거대하다. 그와는 별개로 의상과 헤어는 참 취향인 데다가 멤버들의 외모도 준수해서 외견만큼은 합격점을 주고 싶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용감한형제는 용감한형제일 뿐, 조이 배드애스는 결코 될 수가 없는 것이다.
유제상: 타악기 같은 신스 소리가 듣는 이를 반겨주는 타이틀 '돌려놔'를 비롯해서 총 네 곡이 수록된 싱글. 곡을 봐도 그렇고 춤과 외모, 심지어는 뮤직비디오의 시각 이미지를 보아도 이들이 레트로 요소들의 집합체임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다만 요소들 간 이음새는 매끈하며, 두 멤버의 얼굴은 소녀처럼 곱다. 눈길을 끄는 그룹임은 분명하다.
조성민: 이게 다 〈토토가〉 때문일까. 가장 불편한 지점은, 물론 이 곡이 노골적으로 90년대를 복기하고 있다는 점도, 멤버가 너무 어리다는 점도 있겠지만, 그런 여러 가지 사항들을 다 떠나서, 노래도, 랩도, 춤도, 모든 게 다 어색하다는 점이다. 이 어색함까지도 90년대에서 가져온 거라고 항변할 수도 있겠지만, 제반 여건상 어색할 수밖에 없었던 시대와, 충분히 시정할 수 있었음에도 고의적으로 어색함을 시정하지 않은 것에는 분명히 차이가 있다. 제작자들은 제발, 자기만 90년대를 살아왔다고 착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도대체 자기가 뭘 부르고 있는지 모르는 듯한 표정의 2000년대생 가수에게 굳이 90년대 노래를 계속 부르게 해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블럭: 내가 성인가요 곡을 평할 수 있었다면 진즉에 써서 사람들의 관심을 받았을 것이다. 거기까지는 아직 공부가 부족하여서 트로트라는 장르를 들고나온 리지의 곡 자체를 평가하기는 어렵다. 다만 조영수가 한때 선보였던, 808 악기와 신스로 무장한 트로트와는 달리, 악기 구성이 좀 더 정석에 가깝다는 점은 인상 깊다. 후렴구로 들어가기 전 BPM을 두 배로 늘리는 건 세련된 부분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리지의 보컬 역시 어설픔이나 애교로 무마하려는 지점 없이 잘 만들어진 창법을 선보인다. 이는 〈전국노래자랑〉에서 첫 무대를 가졌을 때도, 〈백인백곡 끝까지 간다〉에서 들려준 '사랑의 배터리', '어머나'를 통해서도 느낄 수 있었다. 클리셰를 정석에 가깝게 파고든 디지페디의 뮤직비디오도 재미있다. 예전에는 리지를 이야기할 때 '귀엽다', 혹은 '독하다'는 평가가 많았는데, 그 이상으로 좀 더 깊은 매력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유제상: 오렌지캬라멜의 일원으로 엽기송(?)을 부르다가 이제 그냥 트로트로 넘어와 버린 리지의 싱글. 노래는 아이돌이 부르는 트로트의 전형 같은 것으로 그 멜로디가 '사랑의 배터리' 풍이다. 이러한 곡이 캐미컬 브라더즈(Chemical Brothers)의 'Get Yourself High'가 연상되는 키치한 뮤직비디오와 대비를 이루면서 여러 세대를 사로잡겠다는 야심을 드러내는 점이 흥미롭다. 트로트라는 양식이 참으로 대중적이라는 생각을 다시금 일깨워준달까. 다만 가사에 있어서는 지나치게 욕심을 부린 티가 나는데, 특히 정형돈이 피처링한 절정부의 랩은 노래 전체의 스토리텔링을 일순간에 여성 혐오적인 것으로 바꿔 놓는다. 하긴 이런 오바가 기존 실패작인 '나처럼 해봐요'의 무미건조함보단 낫지만서도.
조성민: 트로트 히트곡의 공식을 잘 따라간 곡. 오렌지캬라멜에서도 느껴지던 뽕끼가 정통 뽕으로 거듭났다. 여기에 정형돈의 위트 있는 추임새(아마도 랩일까)가 자칫 단조로워질 뻔한 곡에 포인트를 만들어주고 있다. 이렇게 신나고 흥겨우면 됐지, 뭐가 더 필요한가.
김윤하: 매무새가 무척 매끄럽다. 인트로 ‘Pilot Episode’에서 마지막 곡 ‘9월 17일’까지, 두 계단씩 큰 보폭으로 성큼성큼 내려가는 템포와 감정의 속도가 물 흐르듯 흐르고, 그 흐름에 몸을 맡긴 신구 멤버들의 조화도 노련하다. 눈을 꼭 감고 따라가다 보면 조금 숨이 차오르는 드라이브감은 맘먹고 힘을 뺀 브리지 파트와 반복되는 코러스로 살짝 누르고, 뻔하게 흐를 법한 미드템포, 발라드 트랙에서는 다소 과할 정도로 분절마다 힘을 실어낸다. 이 거듭되는 반전이 곡마다의 집중도를 높이며 다시 한 번 앨범을 듣게 만든다. 이 정도면 이제 의문은 왜 그녀들이 아직도 지금의 애매한 위치에 놓여 있는가 뿐이다.
미묘: 때론 절박하기까지 하던 비트감과 귓전을 찌르는 가사의 오글미, 은지의 랩 등이 그리워지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타이틀인 '드라마' 이외에도 '초이스', '주르륵' 등은 모두 기존의 앰비언스를 최대한 살리면서도 완성도 또한 높아 충분한 즐거움이 되어 줄 것이다.
MRJ: 심각한 라인업 변화에서 회복하려는 팀치고는 탄탄한 곡이다. '와일드' 등 이전의 몇몇 곡들만큼 파워풀하지는 않지만, 세라의 보컬이 빠졌음을 눈치챌 기회를 최소화하고, 새 멤버에게 부정적이거나 뜻밖의 모습으로 주목하지 않도록 하는 프로듀서들의 노고가 돋보인다. 아우트로에 등장하는 화성의 해소를 아래의 비디오에서처럼 다른 곳에도 삽입했다면 더 나았을 것으로 생각하지만, 즐겁게 들을 수 있는 트랙이다. 나인뮤지스가 돌아와 앞으로 나아간다는 것이 반갑다.
유제상: 아마 '드라마(DRAMA)를 처음 들었을 때의 일반적인 반응은 "I CANNOT BELIEVE IT'S NOT SWEETUNE'S SONG!" 정도일 듯 싶다. 아니 이 인용구를 쓰면 이 곡이 스윗튠 곡의 대체재 성격을 띤다는 건가. 그런 의도는 아닌데... 여튼 지금까지 나인뮤지스라면 생각나는 몇몇 요소들─흥겨운 곡, 각선미가 강조되는 복장, 경리 클로즈업, 절정부의 애교쟁이 춤까지─이 모두 들어있는 종합선물세트 같은 곡. 스토리텔링이 강조된 가사도 처음 들을 땐 오글거렸지만 '드라마틱한 상황의 드라마'니까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고 본다. 그 드라마가 다행히 임성한의 드라마가 아니었던 게지... 여튼 팬으로서는 만족!
조성민: 기다란 팔다리가 부각되는 시원시원한 군무와 스카프, 멜빵 등의 소품을 활용한 포인트 동작들이 눈에 들어오는 나인뮤지스의 신곡. 한 차례 멤버 변동과 프로듀서 교체가 있었음에도 그다지 큰 어색함은 느껴지지 않는다. 나인뮤지스 노래의 특징이라면 역시 청승맞은 가사와 대비되는 경쾌한 편곡인데, 프로듀서 변동에도 이 특징을 훌륭히 이어간 것을 보면 확실히 멤버들의 역량이 뛰어난 것 아닐까 싶다.
김윤하: 프라이머리에서 브랜뉴 뮤직으로 이어간 파트너 선택은 모범답안에 가깝다. 아마 더 좋은 파트너를 찾기 힘들었을 것이다. ‘예뻐’에서 ‘어디 안가’로 이어지는 원 투 펀지도 더할 나위 없이 탁월하다. 첫 번째 앨범에서 치명적인 약점으로 지적되었던 ‘자기 손으로 가사를 쓰지 않는 MC’의 멍에도 털어냈고, ‘사실 랩만큼 노래도 잘하는 멤버들’이라는 강점도 살렸다. 그런데 그렇게 이제 다 정리되었나 손을 터는 순간 가장 큰 고뇌의 파도가 밀려온다. 이 유닛이 가장 빛나는 순간은 ‘힙합’이라는 거추장스러운 장식물을 전부 거둬냈을 때이고, 이들의 H는 바로 그 힙합에서 비롯한 이니셜이다. 이들이 손수 내세운 정체성을 부정하고 존재를 긍정할 것인가, 아니면 실패의 붉은 팻말을 과감히 들 것인가. 아이돌과 힙합의 더부살이에 대해 의외로 많은 고민을 하게 만드는 앨범이다.
미묘: 이 음반 재미있다. 아이돌이란 결국 기획자와 프로듀서가 가수에게 옷을 입히는 작업. '힙합 출신' 프로듀서가 '비트 찍던 가락'으로 가요를 만들기보다 힙합 프로듀서가 힙합을 만드는데 그것이 아이돌의 맥락을 취한다. 이 음반에 담긴 스왝이 보이는 무해하고 착한 모습도, 인피니트F라는 세계관의 등장인물이 부담 없는 자리에서 털어놓는 '사내아이' 같은 결을 유지한다. 장르란 결국 음악의 '스타일'. 힙합 아이돌을 힙합이란 옷을 걸친 아이돌이라 정의한다면 이 음반은 그 핵심을 꿰뚫는다.
블럭: 브랜뉴뮤직 사단과 손잡고 만든 이번 앨범은 함께 작업한 사람들의 스타일을 잘 흡수한 덕에 장단점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브랜뉴뮤직 특유의 스타일이 인피니트H와 잘 어울린다는 것은 장점이지만, 그 스타일 자체가 독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다소 유치하다고 느껴지는 가사와 라이밍이 있긴 하지만, 오히려 그러한 부분이 자연스러움과 편안한 감상 지점을 가져온다. 동우의 리듬감과 발음, 억양은 훌륭한 성장지점이다. 하지만 강약조절이나 플로우의 완급조절은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은데'와 같은 아쉬움이다. 랩 음악과 힙합 음악의 구분, 혹은 '이 사람들이 하는 음악을 힙합이라고 할 수 있는가'와 같은 진정성의 문제를 차치하고 나면 앨범은 긍정적인 부분이 더러 보인다. 무엇보다 참여진이 확 바뀌었음에도 두 번째 작품이 첫 번째 작품과 어느 정도 결을 함께한다는 점, 두 작품 모두 인피니트의 정체성과 크게 떨어지지 않아 나쁘지 않다는 인상이 든다. 하지만 이미 이들이 할 수 있는 음악이 굳어져 가는 건 아닌가, 그래서 결국 유닛 활동이 장기적으로 가는 데 있어서는 힘든 점도 있지 않나 하는 우려도 든다.
오요: 브랜뉴뮤직과 손을 잡고 만든 앨범답게 프로듀서진의 면면이 화려하다. 한국에서 힙합이 갖추어야 할 미덕으로 꼽히는 모든 요소를 전부 집어넣었다. 트랩을 위시한 강렬한 인트로(심지어 '월드 디제이 챔피언'이 참여, 디제잉의 진정성까지 획득했다)에 이어 여성 보컬, 자전적 가사를 통한 응원가(솔직히 추억의 소울컴퍼니가 떠오르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여러 명이 돌아가며 소위 '쎈 랩'을 쏟아내고 ('바빠서 Sorry'), 적당히 R&B를 섞은 감성 트랙('지킬 앤 하이드')까지 듣고 나면 '그래, 이게 '국힙' 맛이었지......'하며 입맛을 다시게 된다. 오히려 흥미로운 건 타이틀곡 '예뻐'와 '어디 안 가'로 이어지는 부분이다. '예뻐' 같은 경우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말랑말랑한 힙합이지만 베이스의 질감과 후렴 멜로디가 뜻밖에 세련됐다. '어디 안 가'의 사운드는 힙합보다 팝에 더 가까운데 시원하게 뻗어 나가는 멜로디와 세심하게 선택한 전자음이 랩과 잘 맞아떨어져 아이돌 힙합의 최선을 보여준다.
유제상: 다른 건 모르겠고 타이틀곡 '예뻐'가 너무 좋다. 아이돌에게 기대할 수 있는 아기자기함이 끊임없이 쏟아지는 곡이다. 바로 다음 곡인 '어디 안 가'도 그렇고 수록곡 전체가 그야말로 웰메이드. 그러면서도 만드는 쪽 혹은 아티스트의 '버릇'이 드러나지 않은 '범용의 음반'이라는 점이 놀랍다. 하물며 이전 회차 종현의 음반도 '어쨌든 이건 SM産이야'라는 고집이 미약하나마 있었는데. 유닛 활동을 위한 EP조차 이렇게 잘 만들어내다니 훌륭하다 인피니트, 훌륭하다.
조성민: 인피니트의 팬으로서 인피니트의 음악을 '믿고 듣는' 이유는, 제자리를 걷고 있을지언정 절대 뒤로 가는 법은 없기 때문이다. 아직 오지 않은 미래지만, 분명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 인피니트H의 디스코그라피를 보면 'Fly High'와 'Fly Again'은 훌륭한 원투펀치로 기억될 것 같다.
오요: 뮤직비디오가 있길래 눌러보았다가 적잖은 충격과 공포를 맛보았다. 어쩌면 이 뮤직비디오야말로 '미친'이라는 곡 제목에 가장 부합할지도 모르겠다. 뮤직비디오에 경악하느라 도저히 곡에 집중할 수 없어 노래만 들어보니 무난한 발라드곡이다. 대중적인 멜로디와 보컬 덕을 볼 수도 있을 텐데 (이런 식의 '감성 음악'을 좋아하는 층은 분명 존재한다) 낮은 인지도와 이해할 수 없는 뮤직비디오, 어설픈 마케팅 (기본적인 맞춤법마저 지키지 않은 홍보자료) 등을 볼 때 이 곡의 결과란 너무도 자명하다.
유제상: 공식 뮤직비디오를 정지화상으로 도배해야 했던 이들의 사정이 눈물겹다. 바로 전에 발표한 'Keep On'이 얌전한 SMP 같은 곡이었다면, '미친'은 계절에 어울리는 발라드다. 사실 발표한 곡들에 어떤 일관성이란 걸 찾기 어려우니 에이티오의 성격 또한 흐려져 버린다. 물론 자극적인 곡명이 주는 소소한 재미까지 저버릴 수는 없었다. "세 번째 싱글 미친 뮤직비디오", "안녕하세요 에이티오입니다. 이번에 미친 활동 중입니다"... 또 나만 웃는 건가.
미묘: 지난 Part A부터 뭔가 대학로 느낌이 난다고 생각했다. 90년대 가요 작가들이 유희열 풍의 유머를 구사하며 소극장 공연을 하던 대학로 말이다. 이 음반은 '나를 사랑하세요'라는 아이돌 애티튜드의 정반대에서 상냥한 목소리로 공감을 시도한다. 청춘을 노래하기보다 '지나간 청춘'을 노래하고, 가사의 디테일은 일말의 판타지도 주지 않으려는 듯 현실적이며, 화자는 '교복을 벗고'의 첫 줄부터 (아이돌이 아닌) 직장인이다. 가장 어두운 곡인 'Tears on My Lips'에서도 혹시 공격적일까 디스토션 기타의 파형을 뒤집어 뭉근하게 밀어 넣는다. '지우다' 역시 한껏 내밀한 분위기로 재편곡되어 소극장의 공간을 연출한다. 그런 방향 설정 속에서 신중한 균형 조절이 엿보이는데, 취향에 따라 편안하거나 혹은 편안하기만 하게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청아함과 유쾌함, 상냥함을 잘 표현하는 멤버들의 목소리가 조금 더 확실하게 중심에 서 있어도 좋지 않았을까.
유제상: 정규 앨범의 Part A가 나온 지 반년 만에 등장한 Part B. 바로 전에 싱글 발표한 '지우다(Here I AM)'을 포함, 9곡을 꽉꽉 채웠다. 타이틀곡 '교복을 벗고'는 평이한 발라드지만 추억을 자극하는 뮤직비디오가 꽤 감동적. 눈물이 많은 사람은 다른 이랑 같이 보지 말라고 말하고 싶을 정도다. 그건 그렇고 극 중의 옛날은 2002년이네. 그때 병장이었지. 군대 꽤 늦게 갔다고 생각했는데 더 늦게 간 편집장님이 있었...
조성민: 케이팝의 한가운데서 홍대를 외치고 있는 느낌이다. 하지만 이게 절대로 뜬금없다거나 생경한 느낌은 아니고, 오히려 가장 대중적인 비주류, 혹은 가장 인디 같은 아이돌처럼, 누구나 가지고 있는 모순적 양면성을 서로 충돌하지 않게 자기 캐릭터로서 간직하고 있는 것 같다. '어른들의 동화'를 노래하고 싶어 한다는 점이나, 그런 스토리들을 최대한 편안한 방식으로 전달하고자 한다는 점이 써니힐을 케이팝 장르 안에서는 물론, 그 자체로서도 독보적인 팀으로 존재하게 한다.
미묘: 강한 이미지의 소규모 걸그룹들이 요즘 화려하게 뻗어 나가는 곡을 많이 내고 있는 것 같다. 파워풀한 분위기와 뭉클하게 벅차는 감동, 아이돌다운 예쁜 정서까지 함께 담아낼 수 있는, 괜찮은 조합이다. 그러나 정말 미안하지만 이 곡을 진지하게 듣고 섬세하게 평가하기란 너무 어려운 일이다. 지드래곤의 '삐딱하게'를 리듬과 멜로디, 가사 워딩까지 전부 고스란히 가져왔다는 인상을 한번 받은 후로는 자꾸 '뿜겨서' 집중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어그로를 끌려는 목적이라면 모르겠지만, (음, 랩 똑바로 하라고 선언할 땐 언제고 말이다.) 보통은 이렇게까지 베낄 필요는 없지 않을까.
미묘: 마이클 잭슨에 대한 오마주도 좋지만, 제목과 멜로디의 색채, 유리 깨지는 소리와 비명 소리까지 가져올 필요는 솔직히 없지 않을까. 다만 후렴에 도달하기까지의 멜로디가 한껏 가요적이어서, 주어진 소재를 가져오면서도 그 적용성에 대한 안배가 있었다는 점을 높게 보고 싶다. 까실까실해서 귀에 띄는 신스 톤도 좋은 조합을 보인다. 후렴이 폭발력을 갖든 긴장을 유지하든 어느 한쪽으로 좀 더 결단력을 보였다면 더 좋았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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