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흘 간의 아이돌 신작들에 대한 아이돌로지 필진 단평. 블랙핑크, 마마무, 라미슈, 헨리, HNB, 에이핑크, 이달의 소녀(진솔), 보아, 샤넌, 남태현(South Club), 지소울, 프니엘, 스텔라, 효린&키썸, 업텐션, 앤씨아&슈가볼을 다룬다.
랜디: 전작 ‘불장난’이 너무나도 걸출한 트랙이었기에 약간의 아쉬움이 들긴 하지만 ‘마지막처럼’도 꽤나 밝고 신나는, 괜찮은 클럽튠이다. 이제까지 발표한 노래 중에 가장 가볍고 만만하게 춤출 수 있는 느낌을 줘서 빅뱅의 커리어로 비교하자면 ‘마지막 인사’ 같은 위치일 듯하다. 후렴 내내 보컬 멜로디에 따라붙는 같은 음계의 신스에서는 노래방 반주 같은 느낌마저 나는데, 그게 이제까지 블랙핑크의 댄스곡에서 풍기던 어둡고 묵직한 느낌을 희석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큰 덩어리로 들어간 리사의 영어 랩이 식상함을 덜어낸다.
심은보(GDB): 블랙핑크가 지난 싱글들을 통해 챙긴 몇 가지 이미지가 있다면, 이 곡은 ‘붐바야’의 뒤를 잇는다. 이게 전부다. ‘붐바야’가 추세를 반영하려는 일말의 노력이라도 했다면, ‘마지막처럼’의 모든 요소는 시대를 역행한다. 이는 후렴에서 가장 두드러진다. 마치 10년 전 공영방송 끝곡 같은 소리 디자인과 리듬을 듣고 있다 보면, 이 음악이 2017년에 나온 게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다. 리사의 넘치는 재능을 이것 밖에 못 쓰는 것도 YG의 능력이라면 능력이겠다.
햄촤: YG가 자신들이 잘 하는 것을 고집스럽게 지키려 할 때 다소 심통 사납고 재수없어 보일지언정, 다른 기획사와 그룹이 쉬이 흉내내지 못하는 그들만의 노하우는 그 자체로 스왜그였다. 반대로 YG가 보편적 의미의 가요 영역으로 발을 딛을 때엔 어딘지 촌스러워지면서 약점을 드러내는 경향이 있는데, ‘마지막처럼’은 그 경계 위에서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하고 있는 노래다. ‘휘파람’과 ‘불장난’에서 보여주었던 블랙핑크만의 분위기를 그대로 이어가는 듯하던 도입부에서 갑작스레 ‘추억의 롤라장’스러운 사운드와 멜로디의 후렴구 전환은 다소 당황스럽다. 여전히 대중에게 2NE1의 자장 아래 있는 것처럼 여겨지는 분위기를 상쇄하기 위함이었을까. 변화라 하기엔 딱히 트렌디한 방향도, 기존 걸그룹들이 하지 않았던 새로운 콘셉트로의 시도도 아닌 어중간한 지점에 머무른다는 점은 아쉽다. 무엇보다 기존 곡들과의 이질감이 가장 먼저 다가오지만 그럼에도 ‘마지막처럼’은 캐치하고 흥겨운 노래. 제니와 로제의 매력적인 음색은 생각보다 다양한 장르에 어울릴 스펙트럼을 갖고 있고, 강렬하고 짧은 리사의 랩 파트는 노래 속 많은 단점을 상쇄하는 상쾌한 한 방이다. 여름 한 철 즐기기에 이보다 좋은 댄스곡도 드물 것이다.
미묘: 마마무의 음반을 들을 때 가장 즐거운 점과 아쉬운 점 모두, 멤버들의 참여도가 매우 높은 듯한 인상에 있다. “Purple” 역시 상당한 욕심이 엿보이지만 그것이 어딘가에 도달하다 마는 지점 또한 자꾸 눈에 띈다. 그러나 아쉬움으로 몇 번을 듣다 보면 다소의 삐걱임은 ‘나로 말할 것 같으면’의 마치 ‘복잡한 건 넘어가자’는 듯이 팽팽한 기세 속에 제쳐지기도 한다. 남는 것은 2009년경을 연상시키는 가사의 디테일과 질감인데, 이 역시 ‘아재개그’를 듣고 있자면 어쩐지 고개 끄덕여지는 부분이 있다. (개인적으로는, 안 그래도 유쾌한 마마무가 부러 개그 욕심을 내지 말아줬으면 하는 바람도 있기는 하다.) 아저씨들과 놀아드리는 것처럼 들리는 이 곡의 틈새로 “죽여, 죽여”, “아재, 아재” 같은 목소리가 들려오거나, “아저씨군”이 마치 낙인을 찍는 듯이 들리기도 한다. 끼는 많지만 모범생이라 아저씨 말씀 착실히 잘 듣고 배운 20대 같은 인물상에, 일종의 카무플라주로서의 효용이 엿보이는 순간. 앨범 전반의 다소간 덜 세련된, 보다 첨단의 것으로 마감할 수 있었을 것 같은 정서들이 오히려 가능성으로 변하기도 한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은 한참 일찍 치고 들어가는 못갖춘마디나, “아주 건방져” 같은 표현, 그리고 그것이 다른 라인들과 대구를 이루는 관계가 재미있다. 처음엔 ‘요즘 유행하는 트로피컬도 한 곡쯤’ 정도로만 들리던 ‘Finally’도, 가요적인(또는 RBW적인) 명쾌함이 성숙한 질감 속에 흐르다가는 굉장히 케이팝스러운 랩이 화룡점정을 찍는 쾌감이 매력적이다.
랜디: 올해 나온 인디 아이돌(‘저예산 아이돌’이란 단어가 너무 부정적인 뉘앙스라 달리 불러보기로 했다) 중에 가장 캐치하면서 완성도 있는 노래를 들고 나왔다. 올해 유독 신인 인디 아이돌 중 눈에 띄는 팀이 없어서 비교우위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멤버들의 톤이 또렷해서 신스 인스트루멘탈과 어울렸을 때 무리 없이 귀에 들려온다. 인디 아이돌치고는 인원이 일곱 명으로 꽤 많은 편인데, 이 장점을 안무로 살렸으면 한다.
햄촤: 특색 없는 콘셉트와 노래에 특색 없는 멤버들과 목소리. ‘무난무난하게 가자’는 선택을 쉬이 한 것은 아니라 짐작하면서도, 이미 존재하는 스타일과 콘셉트를 굳이 저가형으로 반복하는 의의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된다. 애써 애교 섞인 목소리와 안무보다는 율동처럼 보이는 동작들을 양산하는 이 지독한 유행이 어서 빨리 끝나고 다른 흐름이 찾아오길 기다린다.
심은보(GDB): 전체적인 프로덕션이나 헨리가 노래하는 방식이 2010년대 초반을 떠올리게 한다. ‘촌스럽다’는 뜻은 당연히 아니다. 당시 팝-R&B에서 구현한 모든 요소를 멋지게 잘 녹여냈다는 뜻이다. 간결하고 반복적인 곡 구성 덕분에 유난히 헨리의 목소리에 귀가 끌리는데, 그는 이를 장점으로 바꿀 만한 보컬 톤과 매력을 갖췄다. 헨리를 예능 속의 모습으로만 기억하고 있다면, 다른 곡들도 한 번쯤 찾아보게 만들 만한 곡이다. 사담이지만, 뮤직비디오에서 런드리 피자는 그만 보고 싶다.
김윤하: 〈프로듀스 101〉 시즌2의 나비효과는 어디까지 이어질까. ‘빛이 될게’는 이 방송을 통해 얼굴과 이름을 알린 박우담과 우진영 외, 소속사 HF 뮤직컴퍼니의 또 다른 연습생 조용근, 정원철을 더해 결성된 HNB의 첫 싱글이자 팬송이다. 박우담, 우진영 두 사람이 직접 작사를 담당한 노래는, 다소 평범한 어번 팝 무드 속에 노래의 원래 목적에 충실한 가사로 꽉 채워져 있다. “연습밖에 할 수 없었던 내게 / 한줄기의 빛이 되어준 너” 같은 일반론에서 “너야 너 나야 나가 아닌 너야 너” 같은 특수상황까지 알뜰하게 그러모은 노래는 적어도 이들을 한 번이라도 마음 속으로 ‘픽’ 해봤던 이들이라면 잊을 수 없는 노래일 것이다. 무엇보다 김재환과 함께 시즌2 최고의 보컬로 주목 받았던 박우담의 목소리를 십분 살리지 못한 구성이 가장 아쉬운 점이다.
랜디: 이제까지 에이핑크가 여러 번 그랬듯 S.E.S.의 길을 따르는 노래를 들고 나왔다. 멜로디나 악기 소스에서 S.E.S.가 90년대 후반 일본에서 내놓은 곡들을 많이 떠오르게 한다. 특히 도입부부터 등장하는 “와요 와요 와요 와” 하며 거꾸로 내려오는 Fm 스케일, “둘이서 함께 바라보고 있던”(F-E-Am-Bb/C7) 같은 코드워크, “잠시만 너와 내가”에 겹쳐 등장하는 휘슬 같은 연음 신스 라인 등은 S.E.S.가 99년에 내놓은 “Reach Out” 앨범의 ‘めぐりあう世界’나 ‘(愛)という名の誇り’(모두 시마노 사토리 작곡)과 많이 유사하다. 그러나 에이핑크의 이전 곡들이 그랬듯, 레퍼런스는 분명하나 그를 넘어서지는 못하는 아쉬운 결과물이다. S.E.S.의 곡은 바다의 고음으로 시작하긴 했지만 멜로디에 그럴 만한 당위성이 있었는데, ‘Five’는 그저 높은 음으로 시작하기 위해서 작위적으로 만들어낸 멜로디라는 인상이 강하다. 에이핑크가 이제 와서 ‘가창력’으로 인정받아야 할 일은 별로 없는데, 이런 수를 둬야만 했나 하는 아쉬움이 있다.
미묘: ‘Five’는 ‘Luv’와 매우 흡사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매우 예스럽다. 수록곡인 ‘콕콕’의 다소 미래적인 분위기마저도 90년대의 미래주의를 강하게 연상시키고, 에이핑크를 참조한 현재의 걸그룹 씬을 참조한 듯한 ‘좋아요!’ 역시 ‘에이핑크보다도 오래된 에이핑크’ 같은 질감을 낸다. 물론 비판점이기도 하지만, 보다 조심스러운 조율을 바탕으로 EP의 스펙트럼을 넓히며 ‘에이핑크스러움’을 보다 깊게 파고 든다는 인상을 준다. 이는 다소 화가 날 정도로 전형적인 ‘Always’가 어쩔 수 없이 마음을 파고드는 데에서 확신으로 변한다. 개인적으로는 “Pink Blossom” 시절의 산뜻함이나 “Pink Memory” 시절의 성숙 노선을 좀 더 보고 싶은 미련도 남지만, 에이핑크가 뚝심의 심화를 향해 가고 있다는 점만큼은 의심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이쯤 되면 일종의 ‘장인정신’이라 불러도 되지 않을런지.
햄촤: 걸그룹에게 연차가 늘어난다는 것의 의미는 시도할 수 있는 선택지보다는 잃을 것들을 더 염려하게 된다는 것이다. 에이핑크의 여섯 번째 미니앨범은 그룹이 여태까지 해온 스타일을 탄탄하게 다지는 데에 그 의의가 있으며, 길을 걷다 흘려 들어도 에이핑크의 노래임을 알 수 있는 선명한 색깔의 타이틀곡 ‘Five’는 그에 충실한 결과물이다. 허나 발전과 변화가 없다고 오해하지는 말았으면 한다. 다른 멤버들과 메인 보컬 정은지의 파트가 명료하게 구분/비교되었던 초창기를 생각하면 지금의 에이핑크는 여섯 명의 목소리가 적재적소에 균형 있게 배치되어 서로를 의지하며 동시에 서로를 받쳐주는, 오랜 시간 호흡을 함께 맞춰온 그룹에게서만 느낄 수 있는 안정감을 주는 앨범이다.
랜디: 이달의 소녀 컬러팀의 두 번째 멤버가 공개되었다. 뮤직비디오를 김립의 ‘Eclipse’와 연달아 감상하면, 어반 R&B 사운드로 연결되는 음악은 물론이고, 조금 느른했던 그 곡과 때때로 타이트하게 달리는 이 곡, 레드와 블루라는 색의 대비, 원형과 사각형으로 짜여진 안무 요소의 차이 등을 발견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컬러팀의 솔로 곡들은 이달의 소녀 1/3(+여진)과는 분위기가 아주 다르고 퍼포먼스를 보면 역량의 차이도 좀 있을 것 같은데, 이들을 한 팀으로 모았을 때 대체 어떤 그림이 나올지 가늠이 되질 않는다. 컬러팀 멤버들이 다른 팀에 맞춰 자기 능력치를 다 발휘할 수 없다면 조금 슬플 것 같다. 소비자인 팬에게 이런 기획적 영역까지 상상하게 하는 점이 루나 프로젝트의 매력이겠으나, ‘국민 프로듀서 현상’ 같은 난리통을 한 번 겪고 났더니 실은 이런 점이 조금 피로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1년이나 가동하는 장기 프로젝트의 약점은 이것이 아니었을까. 1년 사이에 이 씬에 어떤 변수가 나타날지 모른다는 점. 그건 그렇고, 폴라리스/블락베리 프로듀스 뮤직비디오는 이제 금붕어를 그만 괴롭혔으면 좋겠다. 원하는 이미지를 얻기 위해 살아있는 것을 소품 활용하는 것에 존중과 조심성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심은보(GDB): 이달의 소녀 1/3과 비교했을 때 해외의 반응이 사뭇 뜨거운 게 먼저 눈에 띈다. “Kim Lip” 때부터 전자음악을 강하게 녹여내며 음악 추세와 가까워진 게 이유가 아닐까 싶다. ‘Singing in the Rain’은 이달의 소녀 1/3 이후의 색채를 더욱 매력적으로 선보인다. 김립의 콘셉트였던 빨강이 음악에서도 뮤직비디오에서도 겉도는 느낌이 들었다면, 양쪽에서 ‘비’와 파랑을 어울리게 구성했단 점이 흥미롭다. 그룹의 콘셉트가 거의 실시간으로 만들어지는 걸 볼 수 있다는 점에서 확실히 이달의 소녀는 매력적인 프로젝트다.
미묘: 하나같이 무뚝뚝한 사운드들로 팽팽한 긴장을 끌어 나가다, 프리코러스에선 공간을 넓혀 곧 이어질 폭발을 예고한 뒤, 정작 후렴에선 다시 긴장을 조인 채 다른 세계로 날아가버린다. 시종일관 어느 것 하나 나긋나긋하지 않고 청자의 욕구를 풀어주지 않는 채로 싸늘하게 이어지는데, 그것이 충실한 쾌감을 이끌어낸다. 프리코러스의 반복적인 멜로디가 다소 지나치게 채워져 있다는 인상도 받지만, 이 곡에서만큼은 그것도 좋은 긴장을 부여한다. 뮤직비디오에서는 모듈러 신스의 대안문명 같은 분위기를 선보이는데, 한동안 내려놓은 듯했던 보아의 트랜스휴먼 노선을 아무렇지도 않게 더 넓혀버리는 것이 또한 반갑게 다가온다. 싱글이라서 너무 아쉬운 것도 간만에 느껴보는 기분.
햄촤: ‘Camo’는 오래전 ‘Valenti’나 ‘My Name’과 같은 화려함이나 긴박한 퍼포먼스, 숨이 차도록 고음역대를 가성과 진성으로 오가는 곡예 같은 멜로디는 없다. 대신 보아는 둔탁하게 울려 퍼지는 박자에 정교하고 자연스러운 퍼포먼스와 노래를 얹어내며 마치 수준 높은 피겨 스케이트 갈라쇼를 보는 듯한 기분을 제공한다. 여전히 고난이도의 미션을 소화하면서도 터무니 없이 쉬워 보이도록 착각하게끔 완성해내는 보아는 여태껏 자신이 해왔던 것들, 자신이 잘하는 것들을 여전히 잊지 않고, 또 잃지 않고 있다. 그에게 그 이상의 무언가를 기대하는 것은 어쩌면 염치없는 일이다.
미묘: ‘눈물이 흘러’란 제목을 보고 일단 겁이 났던 것은 샤넌의 전작들이 그의 보이스가 가진 호소력을 자꾸 신파로 풀어내려 했던 기억 때문이다. 이 싱글은 그런 우려를 시원하게 날려버리며 샤넌의 진면목을 유감 없이 보여준다. R&B 창법으로 메워야 할 멜로디의 빈틈들이나, 블루노트로 애매하게 결착을 짓는 후렴, 상처주지 말아 달라고 애원하는 내용에도 불구하고, 곡은 좀처럼 청승으로 흐르지 않는다. 곡 전체에 걸쳐 제법 날 선 신스가 공간을 찌르고 후비며 만들어내는 속도감과, 무엇보다 못갖춘마디로 선언하듯 터뜨리는 후렴의 “I'm gonna love you”가 들려주는 자신감 때문이다. 이 곡에서 샤넌은 비애 속에서도 할 말은 하려는 인물이고, 그가 가진 보컬 스킬과 파워는 그런 인물을 당차게 표현해낼 멋진 도구가 된다. MBK산 R&B 피처링 랩의 정석을 착실히 밟는 Lil Boi의 버전과, 상당히 대조적인 여성 보컬 듀오의 맛을 느낄 수 있는 엠버의 버전 모두 무척 근사한 감상을 남긴다.
김윤하: 록큰롤, 블루스, 젊음, 자유, 객기. 이 단어들이 가지고 있는 전형적인 이미지들을 한데 넣어 갈아내면 이런 색깔의 음악이 나오지 않을까. 남태현의 위너 탈퇴 후 행보로 많은 주목을 받고 있는 미니앨범은, 앞선 단어들이 내는 빛에 마음을 빼앗겼던 앞선 세대들의 그림자 아래 애써 자리한다. 위너 시절에 썼던 감성 짙은 곡들의 연장선상에서 편곡 방식만 밴드 형태로 바꾼 노래들은 곡 별로 편차가 있는 점이 조금 아쉽긴 하지만 만듦새가 기대이상으로 깔끔하다. 메이저 활동 3년의 짬에서 나오는 바이브가 이런 것인가 싶다. 앞으로의 관건은 사우스클럽이라는 밴드명 앞에 붙어있는 남태현 혹은 남태현 밴드라는 글자가 언제쯤 떨어질까에 달려 있을 것이다.
랜디: ‘이런 것을 하고 싶어서였구나’ 하고 느낄 수 있는 한 장의 미니앨범. 음악부터 스타일링까지 모든 것이 노골적으로 20세기의 록스타 레퍼런스를 따른다. 프론트맨인 남태현에 비해 함께 하는 밴드 멤버들은 상대적으로 알려진 것이 적은 것조차 20세기 인기 록밴드들을 떠올리게 한다. 싱글컷된 ‘더러운 집’을 비롯해 모든 수록곡의 면면이 지난 세기의 운치를 모사하고 있다. 비판하자면 가사의 메시지조차 구시대적이다. 좋아하는 여자의 집에 들여보내 달라며 “뭐 그리 안 되는 게 많아 튕기지 좀 마 난 세 번 이상 참지 못해” 같은 말을 하는 점이 말이다. 다행히도 노래 속에 머무르니 펑크 분위기를 내기 위한 위악이라 볼 수 있겠지만, 이런 위협적인 라인을 즐거이 듣기에는 우리가 처한 현실에 혼자 사는 여성의 공간의 안전을 보장하는 합의가 너무도 부족하다.
미묘: 몇 년 전의 인디록에 그런지를 가미하고, 멜로디는 다소간 가요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 시작하는 밴드로서 어색하거나 들쭉날쭉함 없이 스타일이 착 달라붙어 안정된 사운드를 들려준다는다는 것은 장점. 그러나 이는 또한 이 음반에 담긴 분자식이 ‘한국 인디’의 익숙한 그것과 상당히 유사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래서, 악의를 드러내는 ‘I.D.S’와 ‘Liar’에서 보다 듣는 귀가 동하기도 한다. 멜로디가 가요적 친숙함과 그런지스러운 공허함을 오가며 남태현 특유의 퇴폐미와 어우러지는 점에서 이 밴드의 향후 독자적인 가능성을 엿보고 싶다. 사소한 것이지만, 아티스트 명의가 남태현인지 남태현(South Club)인지 사우스클럽인지는 슬슬 정리해주면 좋지 않을까.
김윤하: JYP와 헤어져 박재범과 차차말론이 손을 잡은 하이어 뮤직(H1GHR Music)과 만나 한 풀 듯 새 노래를 뽑아내고 있는 지소울의 레이블 이적 첫 싱글. 소개글부터 굳이 돌려 말할 것 없이 “클럽에서 흔히 일어나는 One Night Stand에 대해 그리고 있다” 밝히고 있는 노래는 그 이미지 그대로 데킬라, 풀 파티, 여름밤을 연료 삼아 3분 간 빙글빙글 돌아간다. 자메이카 음악의 한 줄기인 댄스홀(Dancehall) 리듬을 배경으로 지소울과 후디의 매혹적인 목소리가 가득 찬 술잔처럼 찰랑댄다. 까맣게 잊고 살다가 어느 날 밤 문득 생각날 정도의 유혹으로는 충분하다.
미묘: 트로피컬풍의 곡이 굉장히 많이 나오고 있지만, 개중 가장 클럽튠에 가까운 형태를 취하고 있다. 후렴에서 트로피컬의 요소들을 확 내려놓고 큰 부피감의 신스가 꽤 무겁게 워블하면서 매우 단순한 보컬 멜로디를 반복하는 것이 그 이유이자, 동시에 곡의 매력 포인트이기도 하다. 프니엘의 보컬은 생각보다 굉장히 잘 달라붙는데, 프리코러스와 코러스에서 각기 다른 음역, 조금 다른 음색으로, 꼭 적당히 맑고 가볍게 울린다. 수지의 솔로 EP에 참여했던, 재지한 취향의 일렉트로닉 음악가 Kairos의 이름이 눈에 띈다. “Piece of BTOB” 연작이 점차 콘서트의 개인 솔로 타임 같은 느낌으로 흐르면서 앞으로 뭘 기대하면 좋을지 알 만한 기분도 드는데, 혹시 의외의 결과가 나온다면 이제부터가 관건이 아닐까 싶다.
미묘: 본때를 보여주겠다는 의기는 좋지만 ‘세피로트의 나무’는 스텔라가 오디오적으로 감당할 만한 트랙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장중하고 긴박한 분위기를 내기에는 보이스가 너무 가녀리고, 간드러지고 은근하게 흐를 순간에는 연출력이 따라주지 못한다. 음색에 훨씬 잘 어울리는 것은 수록곡 ‘왜 때문에’인데, 고전적인 취향의 하우스로 시작해 트로피컬로 빠지면서 가벼운 후렴에 드랍이 에너지를 보충하는 구조다. 다만 그런 세팅에 비해 드랍의 임팩트가 약하고, 이를 메우기엔 “왜 때문에”라는 가사만으로는 다소 역부족이며, 트랙 전반이 썩 깔끔하게 정리돼 있지는 않아서 무척 아쉽다. ‘The Wave’는 트로피컬 가요의 전형에 적당히 부합한다지만, 하나부터 열까지 수준 이하인 ‘Twinkle’에는 “왜 때문에” 밖에는 할 말이 없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음악만은 인상적이었던 스텔라기에, 한없이 표류하는 이 미니앨범은 ‘이달의 상실감’ 타이틀을 부여하기에 손색이 없다.
김윤하: 노래를 잘하는 보컬리스트는 많지만 노래의 맛을 살릴 줄 아는 보컬리스트는 의외로 흔치 않다. 지난 4월 창모와 함께했던 ‘Bluemoon’에 이어 그루비룸과 호흡을 맞춘 이 곡 ‘Fruity’까지 들으며 든 생각은 단 하나, 효린은 정말 맛있게 노래를 할 줄 아는 보컬이라는 사실이었다. 씨스타의 끝내주게 통속적인 노래들 안에서 빛나던 목소리는 지금 대한민국에서 가장 힙하고 재능 있는 프로듀서들의 비트 안에서도 그 빛을 고스란히 유지한다. 노래하듯 랩하듯 그루브를 타는 효린을 따라 키썸 역시 말하듯 랩하듯 멜로디 위에 목소리를 얹는다. 무척이나 상큼하고 세련된 여름 노래다.
랜디: 멜로딕한 힙합 트랙을 잘 만드는 그루비룸의 프로듀싱으로 나온 곡이다. 지난 몇 년 간 씨스타에 길들여진 탓인지, 효린의 목소리를 듣자 마자 ‘아 여름이구나’ 하며 반가운 마음이 먼저 든다. 2003년 일본의 힙합 뮤지션 AKIRA가 Palm Drive라는 프로젝트명으로 발표했던 ‘Holiday’와 조가 같고 코드 진행도 거의 같아서 (워낙 단순해서 아마 우연이었을 것 같다) 그 곡과 비슷한, 해지는 해안도로를 배경으로 하는 오렌지빛 트로피컬의 심상이 떠오른다. 키썸이 채운 32마디가 효린의 보컬과 굉장히 잘 어울려서, 올 여름 여성 아티스트들의 이런 콜라보가 더 많았으면 좋겠다 기대하게 된다.
미묘: 씨스타가 ‘그렇게 된’ 이후 꾸준한 콜라보 싱글을 내고 있는 효린. 과거 가요계에선 지금 트로피컬의 지위를 ‘라틴풍’이 점했더랬지, 하던 참에, (보도자료에는 트로피컬이라고 돼 있지만) 차라리 쿠반에 가까운 곡이 나왔다. 찰랑찰랑한 질감의 악기들이 차분하게 리듬을 짚어 나가는 가운데, 효린의 보컬은 피아노의 저음과 함께 내던지고 트럼펫과 함께 미끄러진다. 후렴 뒤의 리프레인에서 리드미컬하게 밀고 당기는 라인은 특별한 과장이 없으면서도 왜 지금 효린이 독보적인지를 충분히 느끼게 해준다. 자신감 있고 흥겨운 기분을 ‘연기’해내는 키썸과의 조합도 매우 즐겁다. 뮤직비디오에서 기분 좋게 흥겨워 하는 효린의 모습을 표현하는 방식은 좀 다시 생각해 줬으면 싶다.
미묘: 트로피컬의 혼종이 넘쳐나고 있는 지금, ‘시작해’는 비장한 한국 보이그룹과 트로피컬을 정면으로 접붙인 정석과도 같은 곡이다. 조금 못되게 들릴지 모르지만, 유영진 시뮬레이터에 트로피컬이란 변수를 넣어 가장 잘 나온 결과물 같기도 하다. 다만 그런 조합을 떠올리기만 한다면 누구라도 정석이리라 생각할 만한 곡이라, 썩 재미있게 느껴지지는 않는 것도 사실이다. 혹시 조금 일찍 나왔더라면 좀 더 흥미로웠을까? 수록곡 중엔 보다 낙천적이고 어른스러운 ‘Everything’, 같은 트로피컬 케이팝이라도 좀 더 친근하게 다가오는 ‘너다운’이 놓치기 아깝다.
심은보(GDB): 꾸준하게 음악을 발표하고, 꾸준하게 갈팡질팡하는 앤씨아였지만, 적어도 이 곡만큼은 나름 맞는 옷을 입은 듯하다. 특별한 기교 없이 잔잔하게 흐르는 음악 안에서 슈가볼과의 목소리 궁합도 괜찮다. 그래도 앤씨아의 주된 노선이 될 수 있냐고 묻는다면 의문이 드는 게 사실이다. 소녀임을 강조한 발라드나 ‘성인식’ 아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미지 외에 다른 걸 꾀해보면 어떨까 싶은 아쉬움이 남는다. 과거 퍼스트리슨에 미묘가 “앤씨아는 더 참신한 걸 할 수 있다”라 했던 말을 인용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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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replies on “1st Listen : 2017년 6월 하순”
아이돌로지의 음악 평론은 항상 잘 보고 있습니다. 다만 한가지 말씀드리고 싶은게 있습니다. 요즘들어 아이돌로지가 계속 가사에서 정치적이나 사회적인 의미를 억지로 끄집어내어 비판하는 경우가 많은것 같습니다. 노래는 우리고 보고 듣는 대상이지만, 노래 가사 자체가 우리 현실속에 살아 움직이는 대상은 아닙니다. 드라마나 영화처럼요. 그리고 이 미디어들이 선한길만 걸어야 하는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매체들이 무조건 긍정적이고, 법에 위반되지않고, 도덕적 관념을 담아야 하지도 않습니다. 그렇다면 약하게는 기물을 파손하고, 나아가서는 테러까지 일으키는 수많은 영화들은 없어져야하고, 바람을 밥먹듯이 피는 드라마도 없어져야 합니다. 노래도 같다고 생각합니다. 남태현의 더러운 집의 경우 여자에 대한 집착을 다루고 있는데, 가사가 굳이 문제가 된다면 “나와 함께 가면
아주 수십배는 더러워져” 이 부분을 퇴폐적이라는 의미로 비판할수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랜디님께서 “혼자 사는 여성의 공간의 안전을 보장하는 합의가 너무도 부족”이라고 표현하신건 너무나도 확대해서 해석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부분까지 고려해야 한다면, 앞으로 수많은 가수와 작사가들에게 ‘혐오’딱지가 붙여질거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저는 평론가도 아니고, 랜디님의 평론에 간섭할 자격은 없습니다. 다만 아이돌로지를 구독하고 있는 대중가요의 팬으로서 보다 음악적인 평에 집중하셨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글솜씨가 없다보니 가독성이 많이 떨어진거같네요 이해해주셨으면 합니다.
랜디님의 글에 관한 의견이지만, 제가 드릴 말씀이 있는 듯합니다.
물론 모든 작품이 선하고 도덕적인 내용만을 다뤄야 하는 건 아닙니다. 다만 어떤 영화가 살인을 저지르고서 “이것은 우리가 해야 할 일”이라는 메시지를 담는다면 거기엔 논란이 뒤따를 수 있겠죠. 중요한 건 살인이란 소재보다는 그것을 왜-어떻게 다루느냐입니다. 대부분의 메이저 영화가 살인을 다룸에 있어 권선징악적인 구도를 취할 수밖에 없는 것은 그 지점에서 안전을 추구하기 때문이겠죠. (물론 살인을 찍고 싶을 뿐인데 그 안전한 핑계로서 권선징악을 다루는 경우도 있지만, 그것은 ‘도덕적 작품’과는 다른 층위의 ‘작품 윤리’에서 다룰 이야기겠습니다.) 권선징악이어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소재에 대한 비판적 시각이 존재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에 비해 대중음악의 가사는 보다 내밀하고 감정적으로 다가옵니다. 스릴러 영화 속 인물이 “살인은 옳은 일이야”라고 말하는 것과, 노래 가사에서 “살인은 옳은 일이야”라고 노래하는 것을 우리는 전혀 다른 울림으로 받아들입니다. 화자의 발언에 거부감을 느낄 때에도, 반대로 호응할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기에 가사가 어떤 말을 하고 있는지는 영화 등의 “소재”와는 다른 층위에서 살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랜디님이 그 가사에 대해 지적하신 것 역시, 여성의 거주지 안전에 대한 이슈를 염두에 둔 상태에서 집착하는 남성의 “대사”를 들을 때, 이것이 대중음악이므로, 작가의 의도와 차별화된 작품 속 가상인물의 대사로서 거리 두기가 어렵고, 그렇기에 호응하며 음악을 감상하는 데에 장애로 작용한다는 뜻으로 저는 이해했습니다. 그렇기에, 편집자로서, 이 지면에 실릴 가치가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제가 이해하기론, 대중음악에 PC의 시각으로 접근하는 것에 대해 피로감이 높은 요즘이란 점, 다른 이야기를 더 읽고 싶으시다는 점을 말씀하신 듯합니다. 충분히 고개 끄덕여지는 부분입니다. 얼마든지 그러실 수 있고, 존중 받아 마땅하며, 저희 또한 그런 니즈를 외면하려 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다만, 불편해 하시는 그런 부분 역시 꾸준히 지적되고 비평되어야만 하는 점이란 것이 아이돌로지의 시각이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아이돌로지가 PC에 대한 지적만을 한다거나, 오로지 그것을 기준으로 작품을 재단하는 곳은 아니란 점은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적합한 균형점을 찾고자 하는 노력은 멈추지 않겠습니다. 모쪼록 넓은 마음으로 받아들여 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안녕하세요. 랜디입니다. 시간 내서 의견 주셔서 감사합니다. 미묘님이 제가 하고픈 말 대부분을 해주셔서 이렇게 무언가 적는 게 불필요한 첨언이 될 것 같지만, 제게 남겨주신 댓글이니 제가 답하는 게 예의일 것 같아 짧게 적습니다.
저는 대중가요에서 텍스트가 사운드만큼이나 중요하다고 봅니다. 음악에 대한 지식 없이 가사에만 천착하는 비평은 부족한 비평이겠지만, 노래 전체를 조망하려면 가사를 함께 살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텍스트의 분석을 하려면 그 가사가 놓인 사회적 맥락도 당연히 함께 보아야 합니다. 제가 노래와 함께 지적한 현실이 어쩌면 그냥사람님의 이야기는 아닐지도 모르지만, 저는 이것이 현대사회의 중요한 문제이고, 그래서 이 노래가 그런 사회에 어떻게 작용하는지에 대해 함께 생각해보아야 한다고 여겼습니다. 이 행위가 혐오 딱지 붙이기는 아니며, 민주사회에서 자연스럽게 나올 수 있는 목소리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 목소리가 제 것이 되었든, 그 누구의 것이 되었든지간에요. ’노래 가사 자체가 우리 현실속에 살아 움직이는 대상은 아니다’라는 말씀에는 저도 동감하는 바라서, 그러한 오해를 줄이고자 ‘다행히도 노래 속에 머무르니 펑크 분위기를 내기 위한 위악이라 볼 수 있겠지만’이라는 단서를 달았습니다.
그러나 메세지 분석 위주의 비평보다 음악적인 이야기를 더 많이 듣고 싶으시다는 요청도 달게 받아들입니다. 메세지 분석은 블로그나 트위터, 페이스북 같은 곳에서 개인분들도 많이 하고 계시니 아이돌로지에서 음악적 분석을 더 많이 보고 싶으시다는 뜻으로 이해해도 될까요? 새겨듣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블랙핑크 음악 좋게 들었는데 혹평 일색이네요. 뭐 전 전문가들의 견해를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