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초순 발매된 아이돌 신작들에 대한 아이돌로지 필진 단평. SF9, 이달의 소녀(희진), 고고로켓 씨스타, 펜타곤의 데뷔 음반을 비롯해, 하이포20, 엠버&루나, 산들, 몬스타엑스, 식스센스, 샤이니, 젝스키스, 레이, Alesso&첸, 방탄소년단을 다룬다.
유제상: 뭔가 할 것 같다가 사라진 하이포가 유닛 활동으로 돌아왔다. 랩이 주가 되는 타이틀의 이름하여 'Hook가'. 정말 훅 가는 이 곡은 평자가 불편해하는 것들이 잔뜩 있다. ① 래칫 리듬 위에 뭐라 말하는지 알아듣기 어려운 래핑. ② 2000년 전후를 연상시키는 과도한 물 건너온 느낌의 뮤직비디오. ③ 이해할 수 없는 화사의 활용 등. 특히 ②의 경우, 아시안 갱의 스테레오타입 같은 것이 여과 없이 나와 '쯔쯔 요즘 세상에도 저런 걸...'하는 소리가 절로 나온다. 그렇다고 ①이나 ③이 ②보다는 나은 것도 아니다. 특히 화사의 활용은 기가 찰 정도로, 만드는 이의 의견이 반영된 것이라면 확실히 잘못 집어넣은 것이고 화사 본인의 의견이 반영된 것이라면 자의식 과잉이라 하겠다. 누군들 노래 막바지에 나와 목에 힘을 주고 싶지 않겠나.
조성민: 두 래퍼들의 래핑 실력이 수준급이라는 것은 알겠지만, 곡이나 비디오나 딱히 특징을 찾기 힘들 정도로 '흔하다'. 이런 흔한 작품에 두 사람의 실력이 묻혀버리는 것이 아까울 정도. 피처링으로 참여한 화사의 보컬이 반갑게 들리는데, 그만큼 두 래퍼의 '잘함' 외에 다른 재밌는 것은 찾기가 힘들다. 이런 노래와 비디오는 이미 미국 본토에만 오조오억 개쯤 있지 않은지...
햄촤: 본체가 되는 그룹의 인지도도 부족해 보이는 시점에서 유닛을 출격시킨 이유는 어떤 돌파구를 찾기 위함일까. 제목처럼 훅이 강렬하지만 반대로 버스(verse)가 전혀 기억에 남지 않아 아쉬운 곡이다. 탁월하게 두드러지는 가사도 눈에 띄지 않으며, 마마무 화사의 피처링은 오히려 곡의 흐름을 끊는 듯해 노래 속에서 단순한 홍보효과 이상의 역할을 해내지 못한다. 다른 그룹의 래퍼들이 상대적으로 좀 거친 발성을 사용하는 경향이 두드러지는 반면 과하게 힘을 주지 않으면서도 퍼포먼스에서 여유가 느껴진다는 점만큼은 신선했다. 조금만 더 여유를 갖고 다듬었더라면 훨씬 나은 결과물을 보여줄 수 있지 않았을까. 아직 100% 실력을 보여주지 못했다는 인상을 강하게 받았기에 다음번을 기대하고 싶은 유닛이다.
미묘: 비슷한 기획(스펙트럼 댄스뮤직 페스티벌 즈음에, f(x)의 멤버들로)인 'All Mine'과 비교하지 않기 어렵다. f(x)에서 보다 씩씩하고 서정적인 두 멤버로 구성된 보컬 트랙은 확실히 보다 서정적인 접근을 드러낸다. 그렇다면 '울면서 달리는' 프로그레시브 트랜스 시대에 전성기를 가졌던 페리 코스텐(Ferry Corsten)이란 파트너십은, 한국 음반에서 그의 이름을 피처링으로 만나는 날이 왔다는 것이 생경한 것만큼이나 놀랍도록 '정답'이겠다. 그런 '물빛 감성'이 인제 와서 듣기에 오글거리는 사람도 있겠지만, EDM이란 패러다임이 감성 측면에선 이미 프로그레시브 트랜스를 고스란히 가져오고 있었다고 보는 입장에서는 그런 감상도 새삼스럽다. 곡의 구조 역시, 사운드를 듣고 있노라면 드랍이 터질 시점에 다시 새로운 멜로디 섹션("난 알고 있어"...)이 들어서는 형태로, '케이팝 속 EDM 이식'이 이제 완성을 넘어 변종까지 나오는 시절이 되었음을 실감하게 한다. 간소하게 제작된 뮤직비디오에서도 그렇지만 트랙 자체에서 엠버의 감성 보컬을 루나의 앙증맞음이 뒷받침하는 형태로 돼 있다는 점 역시 눈여겨볼 만한 부분.
유제상: 왕성한 SM의 생산력에 경의를 표한다. 누구나 열흘마다 퍼스트리슨이라는 것을 쓰면 이들이 얼마나 치밀한 계획을 가지고 싱글을 발표하는지 알게 될 것이다. 그건 그거고 이 싱글이 싱겁다는 것은 별개의 문제인 것 같다. 'Heartbeat'는 대단히 평범한 하우스 비트의 댄스 넘버인데 그 평범함이 지나쳐 기존에 엠버나 루나가 부른 어떤 곡도 연상시키지 않는다는 게 유일한 비범함일 정도. 뮤직비디오를 보니 엠버는 점점 의젓해지고 루나는 점점 외모가 에일리를 닮아가는 것이 눈에 띄기는 했다. 아무 의미 없게도.
돌돌말링: 요즘 아이돌 메인보컬들은 알앤비에 중심을 두는 이들이 많지만, 산들은 90년대~2000년대 초반 쯤의 발라드 감성을 잘 소화하는 보컬이다. 종종 방송에서 꾸린 무대들로 보아왔던 그 모습대로, 무던하고 단정한 발라드 EP를 가지고 나왔다. 타이틀곡 '그렇게 있어줘'에서는 주변에 있을 법한 청년의 모습으로 분했는데, 이 역시 노래의 편안한 감상을 돕는다. 곡 중 2인칭의 호칭이 '당신'인 것이 아이돌팝에서는 꽤 듣기 힘든 단어라, 약간 노숙한 동시에 진중하게 느껴진다. 이것이 단지 남이 만들어준 정서는 아니구나 짐작할 수 있는 것이 육중완이 곡을 주고 산들이 직접 작사를 한 '나의 어릴 적 이야기'인데, 가사를 훑어보면 지난 세기에 나왔을 법한 포크송 같다. 산들이 잘 하는 것으로 부담스럽지 않게, '야' 같은 곡 등의 분위기 변주로 오히려 소담하게 꾸민 좋은 EP이다.
유제상: 평자에게는 MBC 예능 프로그램 〈복면가왕〉 패널로 더 익숙한 산들의 EP. 타이틀 '그렇게 있어 줘'는 산들의 보컬이 지니고 있는 매력이 한껏 살아나는 발라드 넘버로, 흐느끼듯 속삭이는 비음 가득한 도입부가 참 좋다. EP에 실린 나머지 네 곡도 타이틀의 기조를 잘 살리고 있으니, 꼭 팬이 아니라도 가을 발라드가 고픈 이들에게 좋은 선물이 되겠다. 이승환이 2CD를 내고 그중 하나의 CD를 발라드로 채우던 어느 날 이후로 발라드에 대해 좋은 평가를 내릴 수 없게 되어버린 평자가 산들에게 Pick을 주지 않았다 하여 독자 여러분들은 너무 서운해하지 마시길.
조성민: 타이틀곡 '그렇게 있어 줘'는 어쩐지 이적이 생각나는 발라드다. 가사는 사랑을 기다리는 소년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데, 보컬은 이미 사랑과 이별을 다 겪어본 듯 원숙해서 묘한 매력을 만들고 있다. 앨범은 얼핏 들으면 흔한 발라드 앨범인 듯도 하겠지만, 일관적으로 '착함'을 유지하고 있다는 게 눈에 띈다. 마치 한 번도 춤을 추는 아이돌인 적이 없었다는 듯, 너무나 올바르고 얌전하고 착한 이야기와 착한 보컬로 가득하다. 가사에 자전적인 내용이 많은 것에 비해, 그것이 과시하는 듯 표현되진 않아서 부담스럽게 들리진 않는다. 뻔하게 흘러가지 않은 의외의 발견.
햄촤: 아이돌 그룹의 보컬 멤버가 발라드 솔로 앨범을 낼 때에는 장르의 특성상 팬이 아닌 이들의 귀엔 쉽사리 지루하게 들릴 수 있다는 리스크가 항상 존재한다. 산들의 EP는 그런 함정을 피하기 위해 고심한 흔적이 느껴진다. 곡마다 각기 다른 개성을 살려 담아내면서도 가창력을 어필하기 위해 목소리에 불필요한 힘을 주지 않아 전반적으로 듣기 편안하고, 작사에도 참여한 '나의 어릴 적 이야기'나 가족에게 감사를 담은 '집' 등의 노래들로 인해 마치 한 권의 수필집 같은 느낌마저 드는 앨범이다. 다만 '그렇게 있어줘'와 마마무 휘인이 피처링한 '야!' 두 곡 정도를 빼놓으면 어쩐지 걸맞지 않게 올드한 스타일이라 조급하게 성숙한 이미지를 추구하는 것은 아닌지, 주제 넘은 걱정과 아쉬움을 보태어 본다.
미묘: 전작 뮤직비디오의 다음 이야기가 무척 궁금했는데 구체적으로 이어지진 않아 조금 아쉽다. 뮤직비디오는 서사보다는 추상적 이미지들로 구성돼 있는데, 어둡고 무거운 현실 세계에서 동료들의 공모 결과가 밝은 초현실 세계로 이어지는 점만은 기조를 유지하고 있다고 하겠다. 'Fighter'는 메탈 풍 밴드와 오케스트레이션이 시종일관 뚜띠(tutti)로 거대하고 무겁게 출렁이는데, 'Be Quiet'의 끝나지 않을 듯이 울리는 킥, 'Queen'의 잔뜩 찌그러지는 신스에서도 비슷한 접근이 이뤄진다. 좌우지간 꽉꽉 채우고 끝까지 올려버리겠다는, 거의 막무가내에 가까운 태도가 공격적인 에너지를 잘 담아낸다. 물론, 그런 태도가 유효하게 작동하는 것은 잃을 게 아예 없거나, 매우 꼼꼼해야 가능한 일이다. ('Blind'와 '하얀소녀'는 차라리 한데 묶였으면 어땠을까 싶다.) 앞선 트랙들이 두들겨 부숴놓은 것을 추진력 삼아 찢어질 듯한 에너지만큼은 고스란히 유지하면서 밝게 날아오르는 'Roller Coaster'도 매력적이다.
유제상: 타이틀 'Fighter'를 들으면 스포츠 영화의 사운드트랙을 연상시키는 록 비트가 시작부터 뿜어져 나오는데, 의외로 진부하지 않은 것이 맘에 든다. 노래와 랩이 번갈아 나오는 구조가 예스럽지만 그만큼 곡이 '우직함'을 전달하고 싶음이 절실히 느껴진다. 남성적인 기운을 유감없이 내지르지만 전혀 불편하지 않은데, 모든 것이 제도권 속에서 얌전하고 안전하게 제공되기 때문이리라. 따라서 이들의 결과물은 인상이 강하지만 마초하지 않다. 대단히 세심하고도 치밀한 전략에 의해 만들어진 결과물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겠네. 'Fighter'에 이은 두 번째 트랙 'Be Quiet'도 긴장감을 유지해주는 수작이니 잇달아 들어볼 것을 권한다. 이들에게 기대감이 그다지 없었건만 의외의 발견.
조은재: 이전에 비해 모든 멤버들에게 고르게 주목되게 디자인된 점이 가장 눈에 띈다. 보컬들이 안정적으로 절을 이끌어가는 점도 좋게 들리지만, 클라이맥스를 끌어내는 래퍼들의 활약도 발군이고, 'Fighter'라는 제목에 걸맞게 한껏 '빡세게' 연출된 퍼포먼스도 근래 다른 팀에게서는 본 적 없을 만큼 멋지다. 컨셉추얼하게 '도둑'과 '경찰' 코스프레를 했던 '무단침입'과 마찬가지로 이번엔 '복서'를 연출하고 있는데, 스포츠가 주는 특유의 쾌감까지도 무대에 그대로 녹여내고 있다. '힙합 아이돌'로서의 기조를 이어가는 전체 앨범 또한 주목할 만하다. 직전 앨범이었던 "LOST"에서는 곡에 억지로 멤버들을 배치했다면, 이번에는 멤버들을 위한 맞춤 곡을 설계했다는 인상이 강할 만큼 자연스러워 편하게 감상하게 된다. '솔직히 말할까'나 '백설탕'과 이어지는 듯한 '하얀소녀' 또한 추천하고 싶은 트랙. 다음 앨범으로 이어질 것만 같은 기대감을 만드는 아우트로 'Roller Coaster'까지, 타이틀곡 뿐만 아니라 전체 앨범 또한 충분히 매력적이다. 아이돌 세대교체기라는 중요한 시기에 적어도 한 발짝은 앞서 나갈 발판이 되어줄 앨범.
박희아: 팀명을 직역하면 '육감'인데, 여전히 육감적이지 않다. 이는 멤버들이 가진 아이돌 소스의 문제라기보다는 전체적으로 부족한 프로덕션 탓으로 보인다. 타이틀곡 'Feel Me'는 소싯적 클레오가 떠오르는데, 가까운 세대에서 찾자면 "시작해~"를 외치던 카라의 몇몇 사운드를 많이 답습한 결과물. 마스터링 과정을 거치지 않은 것처럼 야생의 질감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보컬만으로도 당혹스러운데... 묘하게 어긋나는 박자를 캐치하는 순간, 극도에 달하는 안타까움.
돌돌말링: 유튜브 채널을 훑어보니 4인 완전체로서는 첫 싱글인 것 같다. 작은 회사에서 내놓는 걸그룹이지만 메이킹을 따로 공개하는 정성 등에서 노력의 흔적이 보인다. 마이너 멜로디의 진행이나 펀치가 필요한 부분에 브라스를 흉내낸 신스를 넣은 것이 스윗튠이 만든 카라의 '점핑'을 떠올리게 한다. 다만 스윗튠 사운드 특유의 겹쳐쌓은 풍성함은 주지 못하고 있어서, 상대적으로 빈약하게 들린다. 핑크머리 멤버 지율은 댄스팀 '아이디묘' 출신이어서 무한도전 명카드라이브나 아이유와 함께 무대에 선 적도 있었다고 하는데, 얼굴을 알아보는 이들도 있을 것 같다.
유제상: 아케이드를 사람 없을 때 몰래 찍은 것 같은 풍경, 적당한 머리 길이의 젊은 네 여성, 이젠 뭐라 불러야 할지 고민하는 것조차 지치는 댄스 비트와 멜로디, 사마귀 권법!! 같은 흔히 볼 수 있는 안무에 이르기까지, 1년 5개월여 만에 돌아온 식스센스의 신곡 'Feel Me'는 그야말로 한정된 자원을 쥐어짤 대로 짜서 만들어낸 결과물이다. 퀄리티로만 보자면 작년 5월 발표한 첫 싱글 'Barbie Bunny'가 더 나을 정도. 그때는 리더 아이엔에게 초점을 맞춘 건지 힙합 위주의 명확한 음악적 콘셉트라도 있었다. 지금은 그렇지 않은데 말이다.
박희아: 군데군데 소리가 빈 느낌이 드는데, 이게 FT아일랜드와 씨엔블루에서는 잘 느껴지지 않았던 것이라 생소하다. FNC가 생각하는 밴드 음악과 댄스 음악의 차이가 이런 것일까. 데뷔곡이니만큼 좀 더 강한 비트, 무거운 사운드를 뽑았더라면 좋았을 것 같다는 아쉬움을 지울 수가 없다. 대신 마지막 트랙 'Together'는 가벼운 사운드 소스들 덕분에 오히려 가녀린 보컬들이 살아난다. 그건 장점이다.
유제상: 풍성한 멤버 수를 자랑하는 SF9의 데뷔 싱글. 타이틀 '팡파레 (Fanfare)'는 금번 회차의 어떤 곡보다도 요란하다. 연이은 베이스 음이 만들어내는 불안한 분위기와 멜로디를 만들어내기를 거부하는 도입부는 NCT 127의 소방차를 연상시키는데, 후렴구가 좀 더 통속적인 것이 차이를 만든다고 해야 할까. 여튼 FNC 엔터테인먼트가 현재 트렌드를 어떻게 읽고 있는지가 여실히 드러나는 그룹. 남자가 아홉이고, 수록곡의 분위기는 긴박하며(마지막 곡인 'Together' 제외), 뮤직비디오는 휘황찬란하기 이를 데 없다. 사실 곡의 분위기가 낯선 것을 제외한다면 푸짐한 물량공세는 FNC산 아티스트의 특징이기도 하고, 마지막 곡 'Together'가 이들이 누구의 후배인지를 보여주기도 하고.
조성민: 이미 엔플라잉을 통해 힙합에 대한 관심을 드러내던 레이블이 드디어 본격 힙합 아이돌을 프로듀싱했다. 하지만 힙합과 가요 언저리 어딘가에 애매하게 위치해버린 '팡파레'와 왠지 있어 보이는 레퍼런스들을 열심히 가져와 모은 커플링 곡 'K.O.'는 이들이 대형 기획사 소속 신인임을 무색하게 할 정도로 그다지 파괴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보컬도 랩도 충분히 집중되지 못하게 산만하게 배치되어 있고, 설상가상 퍼포먼스 또한 9명이라는 다인원을 제대로 제어하지 못하고 포인트 없이 흩어져 있다. 이렇게 힘 빠져 있는 데뷔곡이 FNC에서 나왔다는 걸 믿기 힘들 정도.
미묘: 애니'알못'이지만 〈스즈미야 하루히의 우울〉이 (2D지만) 애니메이션으로 안무를 소화하는 기술력에 있어 한 방점을 찍었다는 것은 알고 있다. 그리고 〈케이온!〉이나 하츠네 미쿠를 거쳐 지금의 가상 아이돌 전면화까지. 이를 감안한다면 고고로켓 씨스타의 기획에는 참조할 만한 것들이 얼마든지 있을 것이나, 썩 잘 이뤄졌다는 인상은 아니다. 얼굴의 묘사나 프로포션을 비롯해 모델링이 '사실적이지 않음'은 캐릭터성을 강화하기 위한 디포메이션이라 이해할 만하다. 하지만 현실 아이돌의 생동감 있는 움직임과 비교하면 갈 길이 한참인 듯하며, 이는 같은 작품 내에서도 동작이나 장면에 따라 퀄맅티 차이가 크게 나타난다. 래요의 파트에서 마스크의 LED가 반짝이는 장면은 (캐릭터적으로는 흥미롭지만) 현실에서 입을 가린 퍼포머가 유효한 이유를 비롯해 플랫폼에 대한 고민이 부족했음을 엿보게 한다. 랩 섹션의 질감이나 구성, 또는 그 플로우마저 가상 아이돌로서 즐기기에 과연 최적인지 하는 의문이 남는 선택이다. (퍼포먼스가 캐리해줘야 살아날 법한 2절의 복합적 구성은 차라리 애니메이션을 이용한 연출 효과를 극대화할 수도 있을 듯하다. 다만 다소 길게 느껴진다.) 그에 비해 멜로디 섹션은 무척 애니 느낌이기도 하고, 팀 네이밍의 센스도 '어린이 애니'의 질감이어서, 기획의 밀도가 사뭇 성기게 느껴진다. 기획 자체가 정말 3D 캐릭터를 아이돌로 내세우기보다 뒤에 가려진 현실 인물들을 위한 프로모션의 일환인 듯한 복선도 있는데, 그럴 경우엔 캐릭터 플랫폼의 특성을 애매하게 반영한 이 요소들을 어떻게 소화할 것인지도 우려된다.
햄촤: 아무래도 '싸이버 가수'라는 단어의 의미가 좀 오용되고 있지 않은가 싶다. 프로듀서로서 길과 프라이머리가 참여했음에도 불구하고 음악보다는 캐릭터 쪽에 좀 더 무게를 둔 프로젝트라고 밝혔는데, 시작부터 초 치는 소리 같지만 냉정하게 말하면 음악과 캐릭터 둘 다 큰 볼품이 없다. 캐릭터 디자인과 설정 단계부터 좀 더 치밀했다면 어땠을까. 소이, 래요, 제시 세 캐릭터의 설정은 소싯적에 만화 좀 읽었다 싶은 사람이라면 손쉽게 만들 수 있을 정도로 상투적이며, 시각적으로도 이미 2NE1이 실제로 보여줬던 비주얼을 넘어서는 신선함도 없다. 애니메이션의 재미 면에서도 이미 5년 전 2NE1의 'HATE YOU' 뮤직비디오, 아니 그 옛날 H.O.T.의 '우리들의 맹세'만큼의 재미도 찾아보기 어렵다. 게다가 노래를 듣다 보면 실제 가수 정인을 연상시키는 보컬이 있는데, 화면 뒤에서 노래를 부르는 이가 누구인지 신경이 자꾸 쓰이는 싸이버 가수라니... 고릴라즈(Gorillaz)의 성공을 언급하며 고고로켓 씨스타가 장기적인 프로젝트임을 시사했다지만, 현재로선 전망이 썩 밝아 보이진 않는다.
돌돌말링: 오랜만에 솔로 아이돌이 나왔구나 하고 반가웠는데, 알고 보니 그룹의 멤버를 이렇게 순차적으로 공개한다고 한다. 요즘 이렇게 호흡이 긴 프로젝트는 잘 없는데, 거의 쇼와돌급이라 신기하기는 하다. 그 동안 발생할 변수들을 어떻게 관리 할지도 궁금하다. (블락베리크리에이티브는 레이디스코드가 있는 폴라리스의 서브레이블인듯 하다.) 나중에 완전체로 모였을 때 과연 그만큼의 시너지가 날지... 여러모로 관심 갖게 하는 기획이다. 이 달의 주인공 희진은 한 곡을 혼자 끌고 가기에 표현력이 나쁘지 않고, 아직 미진한 부분은 그룹의 일부가 되면 보완이 되겠거니 싶다. 믹싱 역시 희진의 보컬을 잘 살려준 것이, 가성으로 부를 때 비는 바람의 공간감을 심술궂게 진행 되는 꽉 눌린 브라스 소리와 대비 시켜서 새침한 느낌을 준다. 한편 '이달의 소녀'라는 네이밍은 '소녀'라는 단어를 너무 매대 위의 잡지 같은 존재로 만들어버려서 거북하다. 다음 달, 그 다음 달이 되어도 이 기분은 여전할 것 같다.
유제상: 어째서 이런 황당한 이름이 나왔는가? 하고 찾아보았더니 이달의 소녀는 한 달에 한 명씩 소개하여 1년 동안 12명의 멤버를 선보이는 그룹이라고 한다. 매달 부품을 줘서 차 한 대를 완성시키는 일본 잡지도 아니고 어찌 이런 일이... 하고 생각했지만 노래를 들으니 이건 이거 나름대로 놀라운 일이라. 유행을 타다 못해 하나의 장르가 되어버린 뮤지컬 스타일의 곡이지만 긴장감 넘치는 도입부의 흡입력이 남다르다. 엔트로피가 차차로 증가하다가 후렴구의 멜로디가 흩어져 버리는 것이 아쉽지만 괜찮다, 이런 마무리도 나쁘지 않다. 이 노래가 좀 더 널리 알려진 걸그룹이나 솔로 여가수의 곡이었다면 평가는 이것보다 더욱 후했을 것이다. 의외로 다음 멤버를 기대하게 만드는 훌륭한 전채와도 같은 싱글.
햄촤: 한 달에 한 명씩 12명의 멤버를 1년간 차례로 공개하겠다니, 신선하면서도 무모한 기획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전체적으로 노래의 분위기나 뮤직비디오의 비주얼 콘셉트는 어딘지 2~3년 전 아이유와 투개월의 김예림을 섞은 듯한 스타일로 독창성은 조금 떨어지지만, 공을 많이 들인 티가 나는 퀄리티와 더불어 신인이라기엔 발성도 표정도 여유로워 보이는 희진의 모습에 여러모로 준비를 많이 했다는 생각이 드는 싱글이다. 같은 곡의 어쿠스틱 버전이 함께 실려있는데 촬영 메이킹 컷과 자연스러운 모습들이 실린 뮤직비디오도 있으니 관심 있으신 분들은 감상을 권한다. 이 기획의 향방을 점치기엔 아직 이르지만, 당장 다음 달엔 어떤 멤버가 공개될지 궁금하게 만드는 데에는 충분한 한 곡이었다. 그런데 이번 활동 이후 희진을 다시 보기 위해 앞으로 1년을 꼬박 기다려야 한다면, 입덕이 너무 빨라도 곤란한 일 아니려나.
김윤하: 4집 "Odd"와 'View'가 한 텀 쉬어가는 쉼표는 아닐까 추측했던 과거를 청산한다. "Misconception" 앨범 시리즈와 'Everybody'로 보이지 않는 벽을 훌쩍 뛰어넘었던 샤이니는 'View'를 통해 그 벽에 커다란 금을 내었고, "1 of 1"으로 비로소 그 벽을 부숴버렸다. 앨범은 단순히 90년대를 겨냥한 레트로가 아닌 샤이니를 중심으로 재구성된 가상의 레트로 세상을 펼쳐놓는다. 모타운 사운드의 포근함과 뉴잭스윙의 쿨함을 영민하게 취사선택한 밑그림에 마이마이 워크맨이나 핀토스 청바지, 풍부한 공간감을 자랑하는 2016년의 EDM 사운드까지 무리 없이 어우러든다. 이 모든 것을 차치하고라도, 언제든 편하게 꺼내 들을 수 있는 좋은 팝 앨범이라는 점이 무엇보다 훌륭하다. 모든 곡이 좋지만 우리가 기억하는 그 어디도 아닌 샤이니가 그리는 미지의 과거를 따스하게 불러들이는 '투명우산'이 전하는 울림이 특별하게 남는다.
미묘: 언젠가부터 SM의, 또는 샤이니의 지향점은 다소 개념적인 부분이 있었는데, 이번에는 그것이 레트로의 리뉴얼인 듯하다. 시간의 힘에 의해 다시 신선해지는 것이 레트로라고는 하지만, 세대간 공감이 위계 속의 이상으로 자리한 사회에서 특히 아이돌의 레트로가 '어르신들만 좋은 무엇'이란 혐의를 벗기는 어려운 일이다. 원더걸스의 "Reboot"를 발전적으로 승계한 듯한 이 앨범의 레트로는, 마침 필터 모듈레이션 소스가 '힙'하고 '퓨처'한 현재의 유행을 연결고리 삼아, 얼핏 냉정할 정도로 차분하한 뉴잭스윙의 이지적 감성을 가져온다. 누군가가 가져보았고 그래서 미화된 과거가 아닌, 우리들 중 누구도 실제로 가져보지 못하고 동경해야 했던 과거를 재창조함으로써, 아이돌 산업이 갖는 비현실 지향성과 화려한 이상향을 그리는 것, 그것은 질척이는 위계를 떠난 다른 차원의 레트로가 된다. 수록곡들의 완성도를 굳이 말하는 것도 입 아프겠지만, 어느 하나 빼놓을 길 없는 6번 트랙까지의 진행과, 이후의 마무리가 점차 '손에 잡힐 듯한 사운드'와 함께 현대를 향해 다가오도록 설계된 흐름도 근사하다.
박희아: 이 팀이 과거로 회귀하는 방식에 대해 "뭐든 잘하는 샤이니가 레트로도 완벽하게 소화했다."고 일갈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게으른 일이라고 생각한다. 단언컨대, 타이틀곡 '1 of 1'을 위한 콘셉트 스타일링, 뮤직비디오, 안무는 활동곡 하나를 위해 기획된 것이 아니라 앨범 전체를 관통하는 스테이플러 심 같다. 모든 수록곡을 타이틀곡 콘셉트 하나로 이해시킬 수 있는 음악가는 흔치 않다. 레트로는 그냥 때마침 이용당한 셈.
김윤하: 도입부의 둔탁한 리듬 워킹에서 "다신 볼 수 없을 것만 같던 그대가 내 앞에 서 있네요"라는 첫 소절까지, 이것은 지금껏 존재하지 않았던 신개념-레트로-팬-송임을 직감하게 한다. 그 외 곡 전체가 내뿜는 이미지는 거부하기 힘든 선명한 YG 인장, 바로 그것이다. 타블로보다는 위너 멤버들이 작곡에 참여했다는 게 높은 설득력을 가질 노래는, 은지원의 강에서 장수원의 약까지 고른 개성을 가지고 있는 멤버들의 보컬을 일률적으로 'YG스럽게' 연출하는 과감한 어레인징을 시도한다. 그리고 조금 슬프지만 아마도 그 점이 지금 이 노래를 음원 차트에서 롱런하게 만들고 있는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박희아: 이건 좋은 만남이 맞는 걸까. 젝스키스가 가지고 있던 원년의 'Road Fighter형' 에너지를 기억하고 있는 입장에서 보자니 '세 단어'는 어색하고, 또 어색하다. "Blue Note" 당시의 처연한 젝스키스, 그리고 이들을 기다려온 팬들이 갖고 있던 기대감은 화려했던 90년대 아이돌 씬과 그 에너지를 향한 뜨끈한 노스탤지어이기도 했다. 게다가 '새로 입덕'한 세대가 본 것도 그 시절의 곡과, 그 시절의 무대 아니었던가. 그에 반해 타블로가 요즘 쓰는 트랙들은 지극히 세련됐고, 그 세련된 캐릭터가 위너와 아이콘을 안고 가던 중에 젝스키스까지 와락. YG의 색깔이 칠해지고 있다는 건데, 그게 개나리색에 얼마나 가까운지는 잘 모르겠다. 이렇게 말하는 내가 너무 고루한 과거집착형 인간인가.
유제상: 과거에도 젝스키스의 팬은 아니었고 지금도 그렇다만 멤버들이 동년배인고로 틈틈히 미디어에 노출될 때마다 울컥하는 감정은 있었다. 감동이라기보다는 애잔함에 가깝긴 하지만 그들의 생활이 평자와 비교했을 때 특별히 나빴던 것 같지는 않고... 여튼 '세 단어'에 대해 할 말은 이와 유사한 다른 그룹들이 돌아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정해져 있다. 이 곡은 고의로 젝스키스가 활동했던 2000년 전후를 상기시킨다. 양식이 세련되어도 구조는 큰 차이가 없으며, 더군다나 멜로디가 과거의 분위기를 고의로 내려는 혐의가 짙기 때문에 평자 입장에서는 좋은 평가를 내리기 어렵다. 이에 덧붙여 타블로가 참여곡에서 예스러운 분위기를 내는 경우, 그것이 본연의 효과를 거두었던 적이 얼마나 있었던가 싶다. '오빠차' 말고는 기억이 나지 않으니 말이다.
햄촤: 무려 16년 만에 젝스키스가 YG 소속으로 돌아와 타블로가 쓴 곡을 부르리라고 그 누가 예언할 수 있었을까. '세 단어'는 강렬하진 않지만 마치 편지지에 연필로 꾹꾹 눌러 쓴 듯 "지금, 우리, 여기"라는 가사만으로 팬들에게 그동안의 소회와 함께 앞으로를 다짐하는 노래다. 예전과 비교하면 멤버들의 목소리도 변화했고 특히 강성훈의 음색과 성장한 장수원의 보컬이 가장 두드러지는데, 덕분에 처음 들을 땐 목소리 구분이 잘 되지 않아 혼란스럽기도 했다. 파트 구분된 글을 찾아 읽으면서 다시 들어보니 각자의 개성을 살리기보다는 팀으로서 다섯 명의 목소리를 자연스레 조화시키는 데에 무게를 둔 곡이라고 느껴졌다. 앞으로 젝키가 예전의 스타일을 계승하면서도 케이팝 씬의 흐름 속에서 현재진행형으로서의 온고지신이 가능할지, 과연 악명 높은 'YG 플랜'이 얼마나 준비되어 있을지 근심과 기대가 함께 밀려온다. 소싯적 'Road Fighter'를 즐겨듣던 1인으로서 다음번엔 블랙키스의 매력을 한껏 선보일 수 있는 힘차고 신나는 노래가 나오길 바란다.
김윤하: 리듬에서 화성, 편곡까지 기본에 충실하게 뽑힌 유려하고 그루비한 팝 넘버. 곡의 주인공인 레이가 직접 작사 작곡에 참여했는데, 구석구석 살펴 듣다 보면 오랫동안 춤을 춰 온 사람이 손을 댄 노래라는 느낌이 강하다. 노래는 처음부터 끝까지 춤과 무대를 의식하고 곡의 주인공인 보컬이 가진 목소리의 장단점을 똑똑하게 파악하고 있는데, 특히 모 그룹 엑소의 곡들에서 많은 파트를 담당하지는 않았지만 짧은 순간 속에서도 프레시한 감각을 전하던 레이의 비성이 강조된 미성의 매력을 전면에 드러나도록 조율한 점이 돋보인다.
박희아: SM 엔터테인먼트에서 가장 직선적인 시원한 보컬을 꼽자면 f(x) 루나와 엑소 첸 아닐까. 루나는 이를 자신의 솔로 미니 앨범 "Free Somebody"의 'Galaxy'에서 증명했지만, 첸은 여태껏 적당한 기회를 찾지 못했다. 그러나 드디어, 첸의 보컬이 지닌 최고의 장점을 부각시키는 곡이 나왔다. 일렉트로니카 사운드를 뚫고 나오는 목소리는 청량한 페이스를 지닌 당찬 동양인 소년을 떠올리게 한다. 매튜 코마(Matthew Koma)가 불렀던 2012년 원곡과 굳이 비교하자면, 첸의 소리가 좀 더 날카롭게 사운드를 가로지르는 느낌이다. 일렉트로니카 시장에 뛰어든 SM에게는 유용하고 또 유용할 보컬.
미묘: '힙합 아이돌'의 음반이라기보다는 '아이돌적으로 어필하는' 힙합 아티스트의 작업 같다. 그것은 음악의 수준이라기보다는 시선의 차이인데, 불안하고 사랑스러운 소년의 비관적인 관조가 곡마다 한 사람의 시선으로 집중돼 있다. (덧붙이자면 유난히 자주 귀에 밟히는 가족의 호명이나 유년기에 대한 거론이 〈쇼미더머니〉스럽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래서 앨범 전체에 걸친 무거운 정서들이 진솔한 서술과 함께 더욱 무겁게 다가오는 것은 강점이자 약점일 수도 있겠는데, 기존의 탐미적인 세계관이 집중력 있는 1인칭 속에서 전개되기 위해 대부분의 곡이 어두운 색채를 띠게 된다는 부분이다. 다만 각곡은 방탄소년단의 기존 어느 앨범에 따로 삽입되어도 자연스러울 법한데, (5개월 만이라는 짧은 발매 텀이 그래서 마치, 꾸준히 따로 준비해 온 '진짜 작업'처럼 느껴지기까지 한다.) 트렌디한 사운드를 조금씩 건드리면서도 아주 조금 짓궂은 궁상 소년 같은 기존의 질감을 사운드적으로 잘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방탄 스타일'이란 애매한 개념을 나름 꽤나 구체화하고 있을 것을 짐작게 하며, 15곡의 수록곡으로 상당히 일관성 있는, 서구 관점에서의 '정통파 앨범'을 만나는 반가운 경험을 제공한다. 앨범의 성격과 기조를 잘 보여주는 곡으로 'Lie'와 'Lost'를 추천하고 싶다.
박희아: 괜찮은 작품이지만, 아쉬운 점이 뚜렷한 결과물이다. 트랙리스트를 구성한 방식 자체가 전례 없이 획기적이라는 점, 모든 수록곡들이 일정 수준 이상의 퀄리티를 담보하고 있다는 점은 이 앨범이 괜찮은 작품인 이유. 반면에 솔로 트랙에 담긴 개인 서사가 너무 무겁고, 수적으로 큰 비중을 차지해서 혹자에겐 다소 부담스러울 수 있다는 단점이 있다. 후반부에서는 분산시켰던 이야기들을 하나로 모으려는 시도가 이어지지만, 이미 전체적인 밸런스가 살짝 무너진 느낌. 무엇보다 세상 진지했던 "화양연화"에도 '머리 풀고 뛰놀던' 방탄소년단이 있었는데, 그 에너지가 다운된 것이 아쉽다. 그렇지만 마지막 트랙이 'Interlude'니까, 뒤에 뭔가가 이어질 거란 기대가 있다. 지민의 솔로 트랙 'Lie', 팬이라면 속상할 정도로 솔직한 가사가 놀라운 팬송 '둘! 셋!'은 매우 인상적.
돌돌말링: 1집 "Dark & Wild" 이후 두 번째 정규 앨범이다. 이런 해외 직송 같은 사운드를 차트에 한꺼번에 열다섯 곡씩 드롭할 수 있는 것이 현재 씬에서 방탄소년단이 갖는 포지션이자 그들의 강점인 것 같다. 타이틀곡 '피 땀 눈물'은 레게, 하우스, 트랩의 영향을 받았다는데, 느른하면서도 격렬한 것이 쌀쌀해지는 날씨를 거부하듯 아주 훅훅 찌는 톤이다. 무대는 원숙해진 개개인의 표현력에 더해, 제이홉을 필두로 섬세하면서 격렬한 안무를 순조롭게 소화하고 있다. 전 멤버의 솔로곡 수록이라는 기획이 꽤나 파격적인데, 그룹 내에서 내는 솔로곡들이 자칫 보너스 트랙 같은 퀄리티가 되기 쉬운 솔로곡들이 하나하나의 만듦새가 꽤 훌륭하다는 것은 장점이겠고, 개인적인 가사들 탓에 앨범보다는 믹스테입 같은 인상을 준다는 것은 단점이겠다.
수록곡 중 '21세기 소녀'의 가사를 얘기하지 않을 수 없는데, 이 곡이 지난 여성혐오 가사 관련 피드백의 팔로우업이라면 더 세심해야 했다. "Tell 'em you're my lady" 같은 라인은 남성이 본래 가진 젠더 권력을 여성이 자기 소유라는 조건 아래 시혜적으로 베푸는 모습일 뿐이다. 이는 여성의 주체성을 긍정하는 게 아니라서 우먼 임파워먼트라는 애초의 의도를 퇴색시킨다.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그룹이기 때문에 만회할 기회는 또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두 번째 기회란 것조차도 남성이기 때문에 더 쉽게 주어지는 것은 아닌가 돌아보았으면 좋겠다. 'Girls Do Not Need A Prince' 이슈로 김자연 성우를 지지한 안예은 같은 여성 가수가 어떤 괴롭힘을 당했는지 안다면 말이다.
조성민: '상남자'나 '호르몬전쟁'을 부르던 방탄소년단은 이제 아주 사라져버린 걸까. "화양연화" 연작의 히트가 이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컸다는 것은 이해하지만, 방탄소년단만의 패기나 치기가 갈수록 보기 힘들어지고 있는 것은 못내 아쉽다. 애초에 'I NEED YOU'가 히트했던 이유는 섬세하게 쌓아 올렸던 감정이 후렴에 가서 처절하게 터져 나왔고, 그것이 이전부터 단련해왔던 강렬한 퍼포먼스와도 잘 맞아들어갔기 때문이었다고 본다. '피 땀 눈물'이 'I NEED YOU'에 비해 크게 뒤떨어지는 곡인지는 아직 판단하기 힘들지만, 전체 방탄소년단의 디스코그래피를 놓고 봤을 때 이상적인 방향으로 나아간 작품인지 역시 쉽게 판단하기 힘들 것 같다. 성장 서사에 어떤 분절이 온 것 같달까. 다이내믹 없이 현학적인 상징만 한가득 채워져 있는 뮤직비디오 또한 모호해진 팀의 방향성을 드러내는 듯하다. 아이돌의 성장이란, 차트 순위와 같은 양적 성장보다는 팬덤이 공유하는 스토리와 같은 질적 성장에 더 장기적인 의미가 있음을 레이블에서 상기할 때가 왔다.
박희아: 비스트도, 비투비도 생각나지 않는다. 시대가 변한만큼 아이돌 그룹이 소화해야 하는 장르 및 퍼포먼스 공식이 변화해서 그런 것일 수도 있지만, 일단은 여기에 가장 좋은 점수. 일부 곡에서 유난히 가사가 귀에 들어온다는 특징이 있다. "편한 걸까 변한 걸까 이젠 네가 밉지도 않아"('미지근해'), "이 친구야 이미 이 노래는 앞의 8마디에서 대중성을 잃었어"('귀 좀 막아줘') 등 직설적인 토로가 꽤 인상 깊다. 다만 패기의 SWAG 트랙 '귀 좀 막아줘' 같은 경우에는 좀 더 능숙하게 능청맞을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이건 신인이라 어쩔 수 없는 부분일지도 모르겠다.
유제상: 아니 그룹명이 오각형인데 멤버가 다섯이 아니야? 라고 생각한 것도 잠시. 데뷔 EP의 수록곡이 무려 일곱. 게다가 하나하나 듣기에 무리가 없다. 특히 타이틀 'Gorilla'는 다른 수록곡과 비교해보아도 듣기 좋다. 브라스 소리를 기반으로 딱히 끊김 없이 노래가 유려하게 흐르는데, 가사 또한 노래 제목이 왜 고릴라인가가 납득이 될 정도로 매끈하다. 굳이 설명하자면 마음에 드는 여성을 보고 흥분해서 가슴을 치는 고릴라처럼 되어버렸다는거지만도... 케이팝 씬이 레드오션이라 아주 플랑크톤이 둥둥 떠다닐 정도라고는 하지만 이만큼 준비가 철저하다면 살아남을 가능성도 더 커지겠지.
조성민: 곳곳에서 불쑥불쑥 나타나는 신인 특유의 뻣뻣함이 나쁘게만 들리지는 않는다. 일단 아이돌의 전통적인 공식인 '포지션 분업'이 굉장히 잘 되어 있다. 〈펜타곤 메이커〉에서는 모든 멤버들이 다방면에 모두 특출나야 한다고 설명했지만, 사실 역대 성공한 아이돌들은 오히려 각자 맡은 포지션 파트에서만 특출나면 되었고, 팀워크를 통해 나머지 부분들을 상보하는 과정에서 시너지와 매력을 발휘해왔다. 펜타곤은 최근 데뷔한 아이돌 중에서는 그런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아이돌에 가장 근접해있는 인상을 주고 있다. 다들 슬슬 잊어가고 있는 것 같지만, 큐브는 발라드 그룹 비투비에게도 '비밀'과 같은 근사한 데뷔곡과 'WOW'와 같은 보기 드문 댄스 명곡을 쥐어줬던 레이블이다. 펜타곤의 데뷔 앨범은 비스트와 비투비를 프로듀싱하면서 얻었던 노하우들을 집약해뒀다는 인상을 주는데, 크게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잘 만들어진 가요 트랙들에 멤버들이 각자의 개성과 캐릭터를 충분히 강조하는 방향으로 배치되어 있다. 다인원 그룹임에도 데뷔 앨범에서 이 정도의 안정감을 준다면, 일단 합격 아니겠는가.
햄촤: 타이틀곡 'Gorilla'는 둔탁한 비트와 베이스에 규칙적으로 반복되는 브라스, 박수 소리 등 단순하지만 적재적소에 배치된 사운드가 쉴 새 없이 몰아치는 곡의 구조가 잘 맞아떨어져 꽤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킹콩이라도 된 듯 사랑하는 이에게 돌진하겠다는 가사의 은유가 어딘지 익숙하다 싶더니 '으르렁'(엑소)을 작사했던 서지음 작사가의 작품. 노래를 듣기 전엔 '하고 많은 동물 중에 하필 고릴라인가' 의문도 들었으나 어느새 나도 모르게 고개를 까딱이며 훅을 따라 부르고 있었다. 'Gorilla'는 기존의 힙합 아이돌 그룹들이 성공을 거둔 요소들을 나름대로 충분히 연구한 결과물이란 생각이 드는데, 힙합을 표방하는 대인원 보이 그룹이 유행처럼 늘어나는 시장의 흐름 속에서 결국 큐브와 펜타곤은 독특한 콘셉트를 애써 꾸며내기보다는 묵직하면서도 흥겨운 노래로써 정공법을 택한 셈이다. 그리고 그 선택이 꽤 잘 먹혀들어갈 것 같은 예감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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