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초순의 아이돌 신보들에 대한 아이돌로지 필진 단평. 분량 관계로 2회에 나눠 게재한다. 블리티, 더이스트라이트, 데이드림의 데뷔음반을 비롯해, 블랙핑크, 태연, 헬로비너스, 전지윤, 강타, 임슬옹&조이, 문현아, 벤&정은지&지효의 새 음반을 다룬다.
맛있는 파히타: 2016년 데뷔한 수많은 걸그룹 중에서도 블랙핑크는 메이저 중 메이저였지만 개인적으로 손이 잘 가지 않는 편이었다. 전작 "Square One"은 야심 찬 데뷔 싱글이었지만 그 야심만큼의 무리수도 존재했기 때문이다. 그에 비해 신작 "Square Two"는 자연스럽고, 그래서 오히려 블랙핑크의 진면목이 더 잘 드러난다는 느낌이다. '불장난'은 흠잡을 수 없이 정돈되어 있고 'STAY'는 어쿠스틱 기타와 하모니카가 통속적이긴 하지만 멋진 트랜지션을 보여주는 곡이다. 팀의 편성이나 이미지, 음악 모두 역할놀이에 몰두하는 지금의 아이돌 걸그룹 씬의 조류에선 벗어나 있으나 이렇게 태연한 웰메이드라면 언제나 환영할 수 있을 것 같다.
돌돌말링: 상반기에 최고의 노래로 레이디스코드의 'Galaxy'를 꼽았는데, 하반기엔 이 싱글의 '불장난'을 꼽아야겠다. 주문처럼 반복되는 신스가 머리를 떠나질 않는다. 주변에 이 노래를 방탄소년단의 '피 땀 눈물'과 비슷한 느낌이라고 한 사람들이 많던데, 강한 비트에 약간 후텁지근하면서 거친 질감으로 얹힌 마이너 멜로디 때문인가 보다. 멤버 수가 비교적 적어서 파트를 고르게 나누면서도 곡의 구성을 이렇게 심플하게 갈 수 있는 것도 이 그룹의 강점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번 주에 방영한 〈주간 아이돌〉에서는 '쎈언니'(일줄 알았는데 순둥이더라)라는 카피로 홍보하고 있던데, "엄마가 남자 조심하랬는데" 정도의 이야기가 '쎈언니'로 통하고 있는 근래의 여돌판이 얼마나 유아화가 진행돼 있는지를 한번 생각해보게 하긴 한다.
유제상: 돌이켜보면 '휘파람'이나 '붐바야'의 프로모션에서도, '예쁘고 흥겹긴 한데 뭔가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있는 듯한 느낌'은 분명히 있었다. 평자 개인적으로는 그게 2NE1을 지나치게 의식한 수용 태도라고 생각하여 대수롭지 않게 넘겼는데, 그리 오래지 않아 두 번째 싱글이 나오니 먼저 느낀 이물감이 무엇인지 확실히 알 수 있을 것 같다. 이 그룹은 프로모션이 뭔가 과하게 남성적이다. 이게 테스토스테론마냥, 소녀들의 우상이 되기 위해 쿨한 모습을 적절히 선보일 필요는 있지만 진짜로 남자로 만들어버릴 필요는 없다는 거다. '아닌데요 우리 블랙핑크 소녀소녀한데요'라고 말씀하셔도 노래의 어조, 춤사위, 비트의 딱딱함은 대단히 남성적이(며 인위적이)다. 진짜 소녀가 마음이 불타오르는 걸 이런 식으로 표현하나?
햄촤: 블랙핑크를 논할 때 모두가 2NE1을 언급하지만, 그로 인해 오해가 생기는 것은 아닐까. 비록 'Fire'나 'I Don't Care' 같은 기백은 없지만 '붐바야'에선 "오늘밤 너와 춤추고 싶어"라 먼저 말하고 '휘파람'에선 "난 널 택해 안아줘 더 세게 누가 널 가로채 가기 전에"라고 말하듯, 능동적 화자로서 사랑을 노래하는 애티튜드만은 분명히 일관되게 계승하고 있으며 이는 이번 싱글에서도 충실히 유지되고 있다. 특히 'STAY'의 후렴구에서 "굳이 너여야만 하는 이유는 묻지마"란 가사가 인상적으로 다가오는데, '너 아니면 안돼'라는 흔한 태도에서 살짝만 달라졌음에도 상투성을 벗어나는 캐릭터를 형성한다. 어쩌면 이러한 아주 약간의 비틀림이 블랙핑크를 지배하는 정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이전까지 YG가 기존의 트렌드와 대세에 시장이 한쪽으로 쏠릴 때 그 반대지점을 누구보다 빠르게 선점해왔음을 돌이켜 본다면, 블랙핑크는 2NE1에서 한발 물러섰다는 의미보다는 현재 걸그룹의 트렌드에 대한 대칭점을 제시하고 있다는 의미로 다가온다. 다만 극단적인 반대지점이 아닌, 좀 더 중간점을 향해 몇 발짝 가까이 왔다고 보는 것이 맞을 듯하다. 데뷔싱글 '휘파람'의 어쿠스틱 버전이 함께 실려있는데 원곡과는 전혀 다른 느낌으로 다가오니 한 번쯤 들어보시길 권한다.
돌돌말링: 매 회차마다 수많은 저예산 아이돌을 만나지만, 이 곡 '두근두근'은 음원의 상태가 너무 안 좋아서 도저히 평을 할 수 없다. 보컬의 미숙함은 아이돌판에 흔하니 그렇다 하더라도, 마지막에 믹싱을 안 한 건가 싶을 정도로 퀄리티의 정도가 심하게 별로다. 사운드가 마치 누군가의 연습 데모곡을 떼온 것처럼 피니시가 안 돼 있다. 구성이나 멜로디가 나쁘지 않아서 아깝다.
유제상: 간만에 나온 시뮬라시옹의 결과물. '소녀를 모방한 소녀시대를 모방한 소녀'마냥 걸그룹을 모방한 걸그룹인데 결과물이 썩 좋지 않다. 멜로디가 레퍼런스를 호명하는 것은 사실 별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있다만, 그냥 노래를 못하는 것은 심각한 문제가 될 수 있다. 그리고 평론에서의 오바가 아니라, 음원을 들으면 누구나 느낄 수 있을 정도로 노래를 못한다. 이걸 수정할 수 없을 정도로 이들의 상황이 열악한 걸까? 참고로 유튜브는 '검색어: 블리티'를 오타로 인식하여 (애니메이션) 〈블리치〉 검색 결과를 보여준다. 맙소사.
햄촤: 초기 에이핑크의 노래들을 벤치마킹한 듯한 곡의 구조와 보컬 디렉팅이지만, 멤버들은 정작 힘에 부쳐 노래를 간신히 불러내기에 급급한 모양새다. 에이핑크의 많은 노래들은 정은지가 있기에 완성됐다는 사실을 간과한 것 같다. 곡의 퀄리티와는 별개로 세대가 바뀌면서 기존 걸그룹의 성공사례를 어떤 식으로든 벤치마킹하려는 시도가 유난히 눈에 많이 띄는데, 반복을 통해 변화와 발전이 이뤄지게 마련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 편이라 부정적으로만 다가오지는 않는다. 물론 상도덕을 지키는 선 안에서 말이다.
김윤하: 이 노래가 태연의 대표곡이냐 묻는다면 당연히 아니라고 답하겠지만, 태연의 매력을 알아가기에 적절한 곡이냐 묻는다면 무척이나 그렇다 대답하겠다. 'SM 공무원'이라는 별명답게 그룹과 솔로, 소속사 싱글 프로젝트에서 드라마 OST까지 쉼 없이 활동하며 어떤 콘셉트건 차고 모자람 없이 딱 떨어지게 소화해 온 그가 비로소 각 잡힌 자세를 풀고 일상에 가까운 목소리를 들려준다. 나른하게만 들리지만 꽤 고급 스킬이 필요한 전반부를 지나 마치 이제 노래하기도 지겹다는 듯 문득 한 걸음 뒤에서 허밍으로 공기처럼 가볍게 채워나가는 후렴구가 전하는 기운이 전에 없이 가볍고 어쩐지 애틋하다. 대중에게 노출될 대로 노출된 인물과 보컬리스트를 통해 이 정도의 감성과 감정을 이끌어 낸 보컬 디렉터 이주형의 묘기에 감탄한다.
맛있는 파히타: 아이돌 씬에 내로라할 보컬리스트가 많이 있지만 듣는 이를 이내 노래에 젖어 들게 만든다는 점에서 태연의 보컬은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다고 본다. 간소한 편성으로 이루어진 단순하고 담백한 곡으로 너무 짧다 느껴질 정도로 순식간에 젖어 들지만 곡 전체에서 보컬과 어쿠스틱 기타가 자아내는 텐션은 너무 인텐스해서 곡이 끝나면서 아이러니한 해방감을 줄 정도이다.
유제상: 태연의 솔로 활동을 보면 언제나 놀라울 정도의 영악함이 느껴진다. 소녀시대의 기조를 벗어나지 않으면서도 고유의 음악적 컬러를 유지한다. 아이돌스럽지만 멋 내지 않는 멋이 느껴진다. 그러면서도 (이게 중요한데) 아티스트로서의 자신을 과하게 내세우지 않는다. 비슷한 연차의 다른 아이돌들이 벌이는 솔로 활동이 뽐내는 아티스트로서의 무언가를 은은히 드러내는 것은 본인의 역량과 현명함이 없다면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11:11'은 기존의 태연 솔로와 크게 다른 점이 없음에도 전술한 생각들을 도리어 깊어지게 만드는 힘이 있다.
햄촤: 이런 노래를 굳이 싱글로 발표한다는 점이 현재 태연이 어떤 위치에 있는지를 분명히 보여준다고 해야 할까. 'I' 같은 노래처럼 강렬하게 청자를 매료시키진 않지만 마치 버스킹을 하듯 어쿠스틱 기타 선율에만 의존한 나지막한 노래는 오히려 가만히 끝까지 듣게 만드는 매력이 있으며 특별한 음악적 성취에 대한 욕심 없이 그저 노래 자체에 충실한 듯해 더 태연다운 느낌의 곡이다. 태연은 '소녀시대의 태연'과는 명확히 구분되는 그림을 그려나가면서도 두 방향이 서로 충돌하거나 어색해지지 않는, 쉬워 보이지만 결코 쉽지 않은 행보를 계속 보여주고 있다.
미묘: 드럼과 베이스를 신스로 무겁게 깔고 로킹한 기타로 질감을 잡은 뒤 공간감은 넓게. 양식화된 스타일이라 해도 좋겠지만 제대로 작동한다. 비교적 여린 음색과도 썩 좋은 대조를 보이고, 상당히 감정적인 멜로디임에도 전혀 처량하거나 궁상스럽게 들리지 않는다. 간절하고, 가슴 벅차면서도, 품위 있다. 물론 그런 음악이 아이돌 씬에서 (특히 여성 아티스트로) 대히트를 기록한 적은 없다. 그러니 비정규작에 어울리는 것은 맞다. 문제라면 헬로비너스의 정규작이 나온 지 1년이 넘었다는 것이지만, 어차피 하는 방황이라면 지난 5월의 '빛이 내리면'을 비롯해 이렇듯 기품 있고 좋은 작품을 계속 내는 것이 나쁠 수는 없다. 그렇게 믿고 싶다.
햄촤: 리뷰를 빙자한 불만. 판타지오가 어떤 큰 그림을 그리고 있는지, 그저 공백이 너무 길어질 것을 염려해서인지 싱글만을 계속해서 내놓고 있는데 어쩐 일인지 이번엔 뮤직비디오도 없다. 케이팝은 노래와 뮤직비디오 그리고 안무를 볼 수 있는 음악방송 무대가 있을 때 완성된다는 사실을 아직 모른단 말인가. 몽환적인 듯 발랄한 곡조도 "궁금해 너란 아이 널 여행 하고파 긴 활주로를 열어줘"란 가사도 모두 하늘 위를 걷는 듯 좋지만 앞서 이제는 조각이 아닌 구체적인 그림을 보여줄 때가 되지 않았나, 기다리는 입장에서 오히려 조바심이 든다.
미묘: 베리굿은 커리어의 상당한 부침을 겪고 있는데, 달리 보자면 이미 쌓인 레퍼토리로 꽤나 스펙트럼을 넓혀 놓았기에 이를 잘 가다듬는 것만으로 제법 완성도를 기할 수 있는 조건이기도 하다. 이번 미니앨범은 조금은 댄서블한 기조 속에 짙은 가요적 색채를 중심에 두기로 한 모양인데, 상업적 성과와 별개로 그 자체는 설득력 있어 보인다. 비록 그것이, 주태영 작곡가의 작품을 컨템퍼러리 댄스가요로 가져오면서 삐걱대는 것과 마찬가지로 음반 곳곳에 섬세한 조율의 부재를 아쉬워하게 하지만 말이다. 타이틀 '안 믿을래' 역시 그렇다. 조금 낡은 댄스가요의 향취가 트렌디한 일렉트로팝 문법과 맞물리면서 묘하게도 들을수록 귓가에 남아 더 듣고 싶어지는 곡이다. 하지만 멤버들의 음색과 창법이 곡의 맥락과 조화되는 디렉션의 디테일 부족으로 그 가능성을 후렴에서 충분히 발휘하지는 못한다. 진정한 이어웜(ear-worm)의 역할은 후렴 뒤의 비-보컬 훅이 하고 있어 일종의 '드랍'으로 기능하는데, 무척 특이하고 참신하게 느껴지지만 그것이 100% 의도였다고 보긴 어렵다. 개인적으로는 무척 애정이 가는 곡임을 고백하지만, 다음엔 보다 타이트하게 정돈된 베리굿을 보고 싶다.
돌돌말링: 베리굿이 장르 전환을 했다. '베리굿이 이런 걸 이렇게 잘할 수 있었구나' 하고 다시 보게 되었다. 타이틀곡 '안 믿을래'는 전작의 복고풍 귀여움이 거의 남아있지 않은 트로피컬 하우스인데, 여기에 얹히는 멤버들의 목소리가 전혀 겉돌지 않는다. 크레딧을 확인하니 Yeizon 프로젝트 등으로 알려진 낯선과 빅톤이다. (팀 이름을 Zoobeater Sound로 바꿨나보다. 주목할 만한 팀.) 퓨처 소스를 십분 활용해서 전작의 분위기를 이어가는 데 성공한 2번 트랙 '하나하나', 훵키하고 달콤한 스윙곡 'Sugar Sugar' 모두 들을 만하다. 3번 트랙 '나와 사랑을 해'는 베리굿을 탄생시킨 고 주태영 작곡가의 유작에 멤버 다예가 가사를 붙인 곡이라고.
유제상: 6인조 걸그룹 베리굿의 두 번째 EP. 7개월 만의 복귀인데, 못 본 사이 뭔가 변했다 싶은 구석이 있다. 타이틀 '안 믿을래'는 북유럽 스타일의 몽환적인 곡으로 그간의 베리굿이 발표한 노래와는 확실한 차이를 보인다. 다만 특별한 의미가 없어 보이는 시작부의 영어 내레이션이나 뻔한 훅이 곡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감이 있다. 뭔가 절치부심해서 나왔다는 생각이 든다만, 그룹의 낮은 지명도에 또 발목을 잡힐 것인지? 부디 좋은 결과가 있기를 바란다.
햄촤: 꾸준히 나쁘다고 하기에도, 좋다 하기에도 애매한 지점에서 줄타기를 하던 베리굿이 이번엔 조금은 좋다고 느껴지는 쪽으로 가서 자리를 잡았다. 멤버도 한 명 추가되었다고 한다. 후렴구에서 힙합스러운 비트로 변화하는 구성이 흥미로우면서도 어디서 들어본 듯한 느낌인데, 최근 방탄소년단의 '피 땀 눈물'이 살짝 연상되기도 하고 같은 장르이기 때문에 블랙핑크가 연상되는 부분도 있는데, 어찌 되었든 기획의 방향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잡은 듯한 인상은 분명하다. 뮤직비디오는 요즘 트렌드다 싶은 이미지들을 되는대로 짜깁기한 듯 산만하지만 그래서 의도치 않게 재미있는 부분도 있다. 아무튼 어떤 식으로든 앞으로를 기대해볼 여지만큼은 충분히 남겨주는 곡.
돌돌말링: 포미닛 때와는 사뭇 다른 느낌의 곡 '내가 해(I DO)'로 컴백했다. 특유의 허스키함이 포미닛 곡들에선 힘을 많이 줘야 해서 찢어지듯 들렸다면, 좀 더 편한 곡에선 오히려 소년 같은 느낌으로 어우러진다. 어반 R&B + 랩 곡인 'Magnet'에서도 이 힘을 뺀 느낌이 이어져서 편안하게 들을 수 있다.
유제상: 앞서 태연의 솔로 활동을 높이 산 글을 쓴 바 있는데, 이 싱글은 그에 대한 대척점이랄까, 나쁜 결과물로 매도할 수는 없겠지만 전형적인 결과물이라고는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전곡 작사·작곡. 피아노 기반의 낮게 읊조리는 멜로디, 절정부는 가창력을 살려서, 뮤직비디오는 해외 로케, 가급적 맨발로. 이 모든 것들은 클리셰와 같은 장르적 특징의 집합체이며,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진부하다. 사실 그룹 활동에서 본인이 지닌 매력을 모두 다 보여주지 못했다는 점에 있어서 전지윤은 억울한 측면이 있을 것이다. 그래도 평자는 이렇게 평이함의 집합체인 결과물로 돌아오길 원치는 않았다.
햄촤: 제목에 한 번 놀랐고 무난한 발라드라서 다시 한 번 놀랐다. 피아노 중심의 조용한 분위기에서 후렴구로 갈수록 드럼과 기타 사운드가 서서히 겹쳐지는 곡의 연출과 이국적 풍경이 어우러진 뮤직비디오가 퍽 잘 어울린다. 솔로로서 처음 선보이는 노래를 발라드로 정했다는 것은 여태까지의 이미지를 탈피하겠다는 의지처럼 보이고 어느 정도 먹히는 지점이 있지만, 발라드에 어울리는 가수라는 생각은 여전히 들지 않는다. 개인적으로는 포미닛의 데뷔곡 'Hot Issue'에서 보여준 카리스마가 그리운데, 유행어 "내가 내가 해"의 그림자에서 벗어난 진지하고 무거운 곡 하나쯤 선보였으면 하는 기대를 해본다.
김윤하: 오랜만의 새 앨범이니만큼 곳곳에서 주의 깊게 공들인 티가 난다. 어쿠스틱 팝에서 빅밴드 어프로치를 살짝 덧입힌 발라드, 미니멀한 신시사이저 사운드를 활용한 트렌디한 미디움 템포 곡까지 다섯 곡의 수록곡 가운데 어느 하나 같은 얼굴을 가진 이가 없다. 강타의 보컬 역시 마찬가지여서, 자신만의 스타일을 고집하기보다는 각 곡에 어울리는 자신의 목소리를 하나하나 조심스레 찾아가는 인상을 전한다. 그러나 그 수많은 긍정적 신호의 '티'에도 불구하고 앨범에 대한 감흥이 크지 않은 이유는 다소 안일한 접근의 타이틀 곡 '단골식당'의 탓일 가능성이 크다. 콘셉트에서 노래까지 마치 "월간 윤종신"의 번외편 같은 인상을 전하는 노래 너머의 다채로움이 있다는 걸 강조하고 싶다. 심지어 아직 챕터 1에 불과하다는 사실도 함께.
돌돌말링: 타이틀곡 '단골식당'을 처음 듣자마자 '강타 창법 바꿨네?'하고 반응해버렸다. 이 변화는 특히 후렴에서 더 두드러지는데, '이쯤 되면 격하게 꺾으면서 터뜨릴 때가 됐는데' 싶을 때에 아주 절제된 소리를 낸다. (왠지 이 창법 원조 유영진의 반응이 궁금하다) 보컬은 심플하게 맞춘 대신, SM 발라드답게 현에 신경 써서 감정의 고조를 만든다. 본인이 짓고 썼다는 노래는 슴슴하니 일상에 배경음악 삼기에 적당하다.
유제상: 타이틀 '단골식당'은, 한때 최고의 인기 아이돌이었고 화려한 세계를 경험했건만 인간의 근본이 서로 크게 다르지 않음을 느낄 수 있게 해준다. 평자도 요즘 〈심야식당〉이니 〈고독한 미식가〉니 하는 게 부쩍 좋아졌는데, 동년배인 강타가 자신의 장기인 발라드를 바탕으로 식당 이야기를 할 줄은 몰랐다. 물론 감정이 격해진 후렴구부터는 임창정의 노래를 생각나게 하는 측면도 있다. 아니 1절 후렴부터는 그냥 그런 기조로 쭉 간다. 사랑 이야기 말고 일상의 흐름을 담담하게 풀어낼 수는 없었는가 하는 안타까움이 드는 곡. EP 전체 중에서는 다소 흥겨운 분위기의 물 건너온 곡 'Calling Out For You'가 좋았다. 이런 걸 내세우면서 세븐과 '섹시 30대' 대결을 해도 좋았으련만.
햄촤: 그저 '강타 같은' 음악이란 인상이 가장 먼저 다가오는데 그가 쭉 해오던, 이제는 그냥 다른 스타일을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로 그에게 맞춤옷이 되어버린 듯한 곡들로 채워졌다. 그래서인지 굳이 발매일을 확인하지 않은 채로 듣는다면 2016년이 아니라 2006년에 발매된 음반이라 해도 믿길 만큼 익숙하고 편하게 들을 수 있는 앨범이기도 하다. 'Home'이라는 제목은 그래서인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 기존의 것을 발전 없이 답습하고 있다는 것이 아닌 자신이 잘할 수 있는 것을 잘 알고 그것을 고수해온 태도에서 아티스트로서의 고집과 자부심마저 느껴지는, '강타'라는 장르처럼 다가오는 음악들이며, 마치 언젠가의 그의 노래 제목처럼 '상록수' 같은 음악이란 표현을 보태고 싶다.
미묘: 'Pick Me'를 만든 Midas-T가 록밴드 아이돌을 만들겠다고 했을 때, 그리고 이 커버아트의 별스러운 기운을 느꼈을 때, 이런 음악을 듣게 되리라 기대한 사람은 얼마 없을 것이다. ('기타를 사용한 팝'이란 관용적으로 잘못된 표현이 아니라) 기타 리프가 선 굵게 주도하는 장르 '기타팝'을 해버리는 걸 보게 될 줄이야. 맨체스터 사운드의 언저리를 슬쩍슬쩍 맴도는 바람에 조금 과장하면 가끔 프라이멀 스크림이 떠오르는 순간마저 있는 두 곡은, 아이돌과 록밴드 조합의 역사에서 매우 이례적이다. 기타팝에서 맨체스터까지의 구간이 국내에서 유난히 마니아 컬처이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어쨌든 아이돌로서) 꽤나 설득력 있는 결과물인 것은 (조나스 브라더스보다는) 핸슨, 한스밴드와 량현량하의 로우틴스러운 떠들썩함을 채택한 것이 주효했다고 본다. 그 과정에서 ("고!고!"를 비롯해) 다소 90년대 향취로 흐르는 점도 있으나, 이 또한 어쩌면 진입장벽을 낮추는 효과를 발휘한다 볼 수 있을 것.
미묘: 격렬한 분위기 속에 조금 낡은 색채의 비장미를 풀어내는데 멜로디의 질감도 화성진행도 악기 편성도 모두 직접적으로 여자친구를 연상시킨다. 다만 사운드마저 여자친구가 재현하는 그 시절의 것인 데다가 보컬의 처리에 성의가 없어서 좋은 곡으로 듣기는 무리가 있다. 그러던 중 길게 이어지던 멜로디가 "머리가 띵"으로 경망스레 끊어지는 것에 이상하게 귀가 잡아채인다. 이 부분만큼은 밉지 않다. 어디까지 의도한 바인지를 알긴 어렵지만, 디렉팅의 중요성을 재확인하는 부분. 약간의 비성과 허스키가 섞인 보컬 톤에 정감이 가는 멤버가 있다.
돌돌말링: 애수 어린 마이너 멜로디와 록 드럼, 디스토션을 건 기타 등이 일본 아니메의 오프닝 풍이다. 특히 2천년대 초반에 아니메 덕질 좀 했다면 친숙하게 들릴 만한, 뻔하지만 그래서 더 좋은 멜로디. 현재 씬에 이런 노랠 하는 그룹으로는 여자친구가 있는데, 한국 가요처럼 브라스 소스 등을 좀 넣는 여자친구와 달리 이런 걸 아예 싹 빼서 좀 더 본토풍 멜로디가 살도록 했다. 세 명 보컬의 실력에 편차가 좀 있는데, 아무리 일본 아이돌판이 보컬 실력을 기대하지 않는다 해도, 그리고 이 팀도 아마 일본 서브컬처풍을 따왔으니 그런 기획이었을 거라 해도, 이렇게까지 생목을 그대로 음원으로 내는 건 좀…
유제상: 음... 이 정도면 인디 아이돌의 범주에 넣어도 되지 않을까 싶은 결과물. 정말이지 전체를 다 들으면 그런 기운이 온다. 기초적인 발성조차 숙지하지 못한 목소리 하며 디스토션이 과하게 걸린 기타 소리 하며 "이제 난 너의 여자가 될 준비됐어"라는 끔찍한(!) 가사까지. 꼼꼼히 듣고 있노라니 '비수기지만 너무하는 거 아니야'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아니 정말, 다른 사람들은 모르겠다만 학교 밥 먹는 사람은 11월 중순이 정말 정말 바쁜데, 이런 음반을 귀한 시간 투자해서까지 리뷰해야 하느냐고.
햄촤: 곡의 구조와 스타일, 간주 부분의 기타 솔로가 들어가는 것까지 그룹 여자친구의 성공사례를 적극 벤치마킹했다는 인상이지만 전반적으로 퀄리티가 떨어지는 녹음과 믹싱을 포함한 사운드가 많이 아쉽다. 정작 멤버는 3인조인데 곡에 걸맞은 퍼포먼스를 보여줄 수 있을지 걱정과 의문이다. 뮤직비디오라도 있으면 좀 더 이미지 형성에 도움이 될 거 같은데, 현재로서는 달리 어떤 색깔을 띤 그룹인지 알 수 있는 여지가 거의 없어 더 말을 보태기 애매하다.
돌돌말링: 이번 회차에 SM에서 나온 '11:11', '단골식당', 규현의 EP, 그리고 이 곡까지 전부 발라드다. 그리고 비슷하다. 전에도 평한 적 있듯 SM은 댄스는 그렇게 세밀하게 분화하고 디테일하게 만들어내면서 발라드는 '느린 현 편곡' 하나로 퉁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주로 보컬의 역량으로 곡의 색깔이 갈리는데, 이 곡은 다른 곡들과 달리 듀엣이란 점에서 특기할 만하다. 데뷔 전 레드벨벳에서 슬기가 '넥스트 태연'으로 불렸다는 얘길 본 적이 있는데, 이 노랠 듣고 있자면 어쩜 슬기보다는 조이가 태연에 더 가까운 것은 아닌가 생각을 했다. 고른 음색과 섬세한 저음, 그리고 크게 보면은 의외로 대범한 가창 스타일 같은 것이 말이다. 슬옹은 이전에도 '잔소리'라는 걸출한 듀엣 히트곡을 낸 바 있는 프로듀엣러인데, 높고 고운 소리가 이런 여성 보컬과 잘 어울린다.
미묘: 어떤 나라에서는 재즈가 우리에게 트로트처럼 어르신들 취향으로 여겨지기도 한다지만, 우리 대중에게 스윙이 주는 이미지는 아무래도 조금 환상적인 과거일 것이다. 그러한 연상이 보컬의 달콤한 음색과 더불어 꽤나 비현실적인 공간을 연출하면서, 디테일하게 설정된 인명과 인물 설정이 주는 사실적 질감이 기분 좋은 대조를 보인다. 느긋하고 낭만적이면서 작은 페이소스를 더한 것이, 아이돌 출신이라는 히스토리를 염두에 두고 감상할 때 조금은 망상을 일으키기도 하며 감상의 폭을 확장하기도 한다. 약간은 끌 때 끌고 꺾을 때 꺾는 보컬의 연출은 목소리의 매력을 정확하게 살려주고, 무작정 반복하는 프레이즈도 장르적 맛을 더한다. 대한극장을 무대로 학창시절의 추억담을 풀어낸다는 설정이 이문세의 '조조할인'과 떼어놓기 어려운데, 학창시절 회고(와 성장한 인간사)가 성인이라면 대체로 좋아할 수 있는 소재다 보니 다양한 계층이 기분 좋게 들을 수 있는 곡이 된 것 같다. '어느 세대에게든 통하는' 것은 아닌 추억담을 들어보고 싶은 욕심도 갖게 하는, 조심스러우면서도 매력적으로 마무리된 싱글.
돌돌말링: 제목 정말 힙하다… 전작이나 자기 이름으로 낸 책 등으로 짐작컨대 문현아가 지향하는 감성이 뭔지 조금 알 것 같은 싱글. 편한 재즈곡. 본격 스캣도 한다. 본인이 직접 쓴 학창시절 이야기가 남성중심 로맨틱 및 섹슈얼 가사 과잉인 케이팝 씬에 조금 숨돌릴 틈을 주는 것이 좋다. 아, 역시 여성 싱어/송라이터들이 더 있어야 해.
유제상: '뭐? 나뮤 문현아가 솔로 싱글을 낸다고?' 하면서 두근거리는 마음을 안고 음원을 틀었건만 결과물은 (당연히) 댄스곡이 아니라 재지한 팝이었다. 굳이 분류하자면 인디 계열의 솔로 활동이라고 봐야 할 것인데,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목소리가 팬시하면서 귀여워서 이런 방향으로 가도 좋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아니, 다른 한 편으로 생각해보면 여지껏 본인이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 알 수도 없는 섹시 가수의 인생을 몇 년이고 살아왔다는 건데 문현아가 사람이면 자기 취향도 있을 것이고, 솔로 활동은 당연히 잔잔한 노래로 하겠지. 그걸 듣고 왜 춤을 안 출까 실망한 나란 사람...
박희아: 이미 이런 분위기의 곡에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에이핑크 정은지, 도입에서 무난한 수준의 보컬로 별다른 장점을 보여주지 못한 트와이스 지효. 이 곡에서 그나마 승자를 꼽으라면 지효와 정은지 사이에서 독특한 목소리로 곡에 생기를 불어넣는 벤이다. 세 사람 모두 좋은 가창력을 지닌 아티스트인데 영 아쉬운 이유라면, 역시 '내가 예뻐진 이유'라는 제목에서 연상되는 평이한 가사와 기시감이 강하게 느껴지는 멜로디 때문인 걸까. 그렇다면 파트 분배에서라도 예측하기 어려운 강수를 둬야 했다. 이미 보컬 실력으로 인정받은 정은지가 안정적인 선택이었다는 것은 인정한다. 하지만 이벤트성 음원이니만큼 벤과 지효가 후렴을 소화했다면 좀 더 색다른 느낌을 줬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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